정끝별 시인 / 풋여름
어린나무들 타오르고 있어요 휘휘 초록 비늘이 튀어요 풋, 나무를 간질이는 빛쯤으로 여겼더니 풋, 나무 몸을 타고 기어올라 풋, 나무 몸에 파고들어요 가슴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을까요 어느새 휘감치는 담쟁이 덩쿨은?
온몸을 뒤틀며 뿌드득 뿌드득 탄성을 지르며 풋, 나무 힘줄 세우는 소리 용트림하는 풋, 나뭇가지
초여름 저물녘 입술 자국에 겨드랑이부터 뚝 뚝 초록 진땀을 흘리고 있어요 풀물냄새를 풍기는 저 풋, 나무 담쟁이 치마폭에 폭 싸여
정끝별 시인 / 사과 껍질을 보며
떨어져 나오는 순간 너를 감씨 안았던 둥그렇게 부풀었던 몸은 어디로 갔을까 반짝이던 살갗의 땀방울은 어디로 갔을까 돌처럼 견고했던 식욕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식탁 모퉁이에서 사과껍질이 몸을 뒤틀고 있다 살을 놓아버린 곳에서 생은 안쪽으로 말리기 시작한다
붉은 사과껍질은 사과의 살을 놓치는 순간 썩어간다 두툼하게 살을 움켜진 청춘을 오래 간직하려는 과즙부터 썩어간다
껍질 한 끝을 집어 든다 더듬을수록 독한 단내를 풍기는 철렁, 누가 끊었을까 저 긴 기억의 주름
까맣게 시간이 슬고 있는데
시집 - 삼천갑자 복사빛(2005년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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