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수향 시인 / 중심
11월에도 꽃이 필 수 있다는 듯이 배추가 제 삶의 한창때를 건너고 있다 꽃을 피우고 싶어하는 푸른 이마에 금줄같은 머리띠 하나 묶어주려고 이참 저참 때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배추는 중심이 설 무렵 묶어주어야 한다고 귀뜸을 한다 배추도 중심이 서야 배추가 되나보다 속잎이 노랗게 안으로 모이고 햇살 넓은 잎들도 중심을 향해 서기 시작한다 바람이 짙어지는 강물보다 더 서늘해졌다 띠를 묶어주기에는 적기인 것 같아 결 재운 볏짚을 들고 밭에 올랐더니 힘 넘치는 이파리가 툭 툭 내 종아리를 친다 널따란 잎을 그러모아 지그시 안고 배추의 이마에 짚 띠를 조심스레 둘렀더니 종 모양 부도처럼 금세 단아해졌다 부드러운 짚 몇 가닥의 힘이 참 놀랍다 이제 배추는 노란 제 속을 꽉꽉 채우며 꽃과 또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추수 끝난 들녘에 종대로 서 있는 배추들 늦가을의 중심으로 탄탄하게 들어서고 있다
2005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심수향 시인 / 황색신호
등대 벼랑에 나리꽃 무더기 황색신호등같이 노랗게 피어 있다 손 내밀며 한 발 한 발 내려서다 아찔한 천길 절벽 파도 부딪는 바람벽을 만나다 점멸하는 대기신호에 걸린 듯 올라올 수도 내려갈 수도 없어 나는 후들거리며 그대로 멈추어 있다 눈은 감아도 떠도 캄캄하다 눈썹 끝에 걸린 절벽 밀쳐내기 위해 꼿꼿이 선 채 먼 하늘 올려다본다 바다에 모로 기대 잠든 하늘에도 붉은 꽃무리 어제처럼 지고 있다 이제 수평의 눈길 그 아래는 보지 않을 터 보이지 않을 때는 절벽도 추상이다 아찔한 이 벼랑도 오금저리면서 내려다 볼 수 있는 풍경이 될 것이다 돌아보며 물러나온 하얀 지붕 암 병동 삶의 모서리에서 만난 이웃집 같은 황색신호가 풀리고 파란 불이 켜진 듯 나는 담담한 걸음으로 돌아서고 있다.
심수향 시인 / 꽈리를 불며
꽈리 한 알, 가을 햇살에 입술 데여 봉긋한 꼬투리 찢어지면, 거기 조그만 태양 하나 발갛게 불타고 있다 잠시도 머물다 가는 시간 없어 세상의 발들은 바쁘지만 면벽한 꽈리는 홀로, 단단하게, 깊이 익어가고 있다 스무 해 정도 가부좌를 튼 首座 같기도 하고 槪論書의 마지막 장을 쓰는 철학자 같기도 한 오만한 그 순수가 참 미쁘다 속내를 알고 싶어 자주 만지작거리면 자신을 투명하게 내보이는 꽈리, 얼마나 익었는가 붉은 속살 깊숙이 날카로운 가시 찔러 보면 살아 있는 씨앗들이 함성처럼 흩어진다 비워지기 위해선 피할 수 없는 巡禮의 길이여 내장까지 깨끗하게 다 비워내고 나면 붉은 꽈리의 色과 空은 한 겹 껍질로 경계 짓느니 텅 빈 꽈리 속으로 입 바람 불어넣고 뽀드득 뽀드득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 누구도 비우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空으로부터 온 소리여 나도 그 한 소리 얻기 위해, 오늘 내 안의 모든 色들을 터트려 버린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안상학 시인 / 설득 외 2편 (0) | 2022.02.08 |
|---|---|
| 위승희 시인 / 이별, 그 사소함 외 2편 (0) | 2022.02.08 |
| 원무현 시인 / 해바라기 외 1편 (0) | 2022.02.08 |
| 우무석 시인 / 나무들에 대한 묵상 외 1편 (0) | 2022.02.08 |
| 연왕모 시인 / 전망 좋은 방 외 2편 (0) | 2022.02.0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