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심수향 시인 / 중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8.

심수향 시인 / 중심

 

 

11월에도 꽃이 필 수 있다는 듯이

배추가 제 삶의 한창때를 건너고 있다

꽃을 피우고 싶어하는 푸른 이마에

금줄같은 머리띠 하나 묶어주려고

이참 저참 때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배추는 중심이 설 무렵

묶어주어야 한다고 귀뜸을 한다

배추도 중심이 서야 배추가 되나보다

속잎이 노랗게 안으로 모이고

햇살 넓은 잎들도 중심을 향해 서기 시작한다

바람이 짙어지는 강물보다 더 서늘해졌다

띠를 묶어주기에는 적기인 것 같아

결 재운 볏짚을 들고 밭에 올랐더니

힘 넘치는 이파리가 툭 툭 내 종아리를 친다

널따란 잎을 그러모아 지그시 안고

배추의 이마에 짚 띠를 조심스레 둘렀더니

종 모양 부도처럼 금세 단아해졌다

부드러운 짚 몇 가닥의 힘이 참 놀랍다

이제 배추는 노란 제 속을 꽉꽉 채우며

꽃과 또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추수 끝난 들녘에 종대로 서 있는 배추들

늦가을의 중심으로 탄탄하게 들어서고 있다

 

2005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심수향 시인 / 황색신호

 

 

등대 벼랑에 나리꽃 무더기

황색신호등같이 노랗게 피어 있다

손 내밀며 한 발 한 발 내려서다

아찔한 천길 절벽

파도 부딪는 바람벽을 만나다

점멸하는 대기신호에 걸린 듯

올라올 수도 내려갈 수도 없어

나는 후들거리며 그대로 멈추어 있다

눈은 감아도 떠도 캄캄하다

눈썹 끝에 걸린 절벽 밀쳐내기 위해

꼿꼿이 선 채 먼 하늘 올려다본다

바다에 모로 기대 잠든 하늘에도

붉은 꽃무리 어제처럼 지고 있다

이제 수평의 눈길 그 아래는 보지 않을 터

보이지 않을 때는 절벽도 추상이다

아찔한 이 벼랑도 오금저리면서

내려다 볼 수 있는 풍경이 될 것이다

돌아보며 물러나온 하얀 지붕 암 병동

삶의 모서리에서 만난 이웃집 같은

황색신호가 풀리고 파란 불이 켜진 듯

나는 담담한 걸음으로 돌아서고 있다.

 

 


 

 

심수향 시인 / 꽈리를 불며

 

 

꽈리 한 알, 가을 햇살에 입술 데여

봉긋한 꼬투리 찢어지면, 거기 조그만

태양 하나 발갛게 불타고 있다

잠시도 머물다 가는 시간 없어 세상의 발들은 바쁘지만

면벽한 꽈리는 홀로, 단단하게, 깊이 익어가고 있다

스무 해 정도 가부좌를 튼 首座 같기도 하고

槪論書의 마지막 장을 쓰는 철학자 같기도 한

오만한 그 순수가 참 미쁘다

속내를 알고 싶어 자주 만지작거리면

자신을 투명하게 내보이는 꽈리, 얼마나 익었는가

붉은 속살 깊숙이 날카로운 가시 찔러 보면

살아 있는 씨앗들이 함성처럼 흩어진다

비워지기 위해선 피할 수 없는 巡禮의 길이여

내장까지 깨끗하게 다 비워내고 나면

붉은 꽈리의 色과 空은 한 겹 껍질로 경계 짓느니

텅 빈 꽈리 속으로 입 바람 불어넣고

뽀드득 뽀드득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

누구도 비우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空으로부터 온 소리여

나도 그 한 소리 얻기 위해, 오늘

내 안의 모든 色들을 터트려 버린다

 

 


 

심수향 시인

1949년 울산 출생. 2003년 <시사사> 신인상. 2005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중심> <살짝 스쳐가는 잠깐> 한국시협. 숙명문인회. 펜마을울산지부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