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안상학 시인 / 설득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8.

안상학 시인 / 설득

 

 

지하철 옆자리 술 취한 조선족 사내

연신 코방아를 찧으며 전화를 하는데

 

니 혼자 앉아 바위 찧지 말고

힘들 일 있으면 얘기해라

니 오십 물리고

내 오십 물리면 되지 않캈어

어려운 일 있으면 이야기해라

니 혼자 앉아 바위나 빻을 생각 말고

 

솥뚜껑 손에 구형 스마트폰

만주 벌판 눈보라깨나 맞아본 듯한

어딘지 함경도 사투리 냄새 나는 사내

어디 끌고 가서 막걸리나 한 잔 하고 싶은

어깨도 두툼한 조선족 사내

 

니 오십 물리고

내 오십 물리고

 

(2021 오늘의 좋은 시, 푸른사상 : 출처, 시와사람 2020 겨울호)

 

 


 

 

안상학 시인 / 버력더미 자작나무

 

 

강원도 하고도 정선, 정선 하고도 사북 어디

폐탄으로 쌓아올린 버력더미 검은 산에는

어디선가 날아온 자작나무 씨들만이 오직

불모의 검은 땅에 뿌리 내리고 싹을 틔워

그 곧고 희디흰 줄기를 쑥쑥 뽑아 올리며 산다는데

 

검은 땅에서도 희디희게 살아가는 자작나무의 마음은 아무래도 푹푹 내리는 함박눈을 닮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네

 

이도저도 다 떠나보낸 동지섣달 함박눈 푹푹 내리면

어떤 물도 하늘에서 내려오면 희디흰 색이 되는 한겨울이면

버력더미나 자작나무나 새하얗게 덮어주는 눈의 마음

 

검은 땅에서 흰 몸을 뽑아 올리는 자작나무야

검은 산에서 흰 숲을 이루어가는 자작나무야

 

애당초 자작나무의 마음속에는 버력들이 떠나온 갱도의 깊은 슬픔 같은 어둠에 뿌리를 둔 어떤 서러움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네

 

 


 

 

안상학 시인 / 소서 무렵

 

 

십여 년 전 빌뱅이 언덕에서 받아온 범부채꽃

석 달 장마 끝에도 마당 한 구석을 환하게 밝혀놓았네

볼 때마다 빌뱅이 언덕이 떠오르는 꽃, 범부채꽃

올해는 유난히도 내가 좋아하는 호랑나비를 많이도 불러들였네

나는 신이 나서 범부채꽃처럼 하늘거렸네

 

때를 같이 하여

몇 해 전 악양 동매에서 얻어온 제피나무 한 그루

올 여름은 제법 수형을 갖추어서 보기에도 좋았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잎이 거의 다 사라지고 없었네

오며가며 향기도 맡고 맛도 보곤 했는데

가까이 가보니 애벌레들이 가지마다 붙어있었네

나는 그만 잎을 따듯 모조리 떼어내어 뒷산에다 던져버렸네

어쩐지 나는 시무룩해져서

초췌한 제피나무 곁에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있었네

 

며칠 후 나는 애벌레가 마음에 쓰여 검색해보았다

호랑나비 애벌레였다 미상불 호랑나비 애벌레였다

 


 

안상학 시인

1962년 경북 안동시 출생.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1987年 11月의 新川' 당선. 시집 『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오래된 엽서』 『아배 생각』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2015.10. 제15회 고산문학대상 시 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