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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영조 시인 / 물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9.

임영조 시인 / 물

 

 

무조건 섞이고 싶다

섞여서 흘러가고 싶다.

가다가 거대한 산이라도 만나면

감쪽같이 통정하듯 스미고 싶다.

 

더 깊게

더 낮게 흐르고 흘러

그대 잠든 마을을 지나 간혹

맹물 같은 여자라도 만나면

 

아무런 부담없이 맨살로 섞여

짜디짠 바다에 닿고 싶다.

 

온갖 잡념을 풀고

맞도 색깔도 냄새도 풀고

참 밍밍하게 살아온 생을 지우고

찝찔한 양수 속에 씨를 키우듯

외로운 섬 하나 카우고 싶다

 

그 후 햇빛 좋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증발했다가

문득 그대 잠깬 마을에

비가 되어 만날까

눈이 되어 만날까

돌아온 탕자의 뒤늦은 속죄

그 쓰라린 참회의 눈물이 될까

 

 


 

 

임영조 시인 / 그대에게 가는 길 4

 

 

그대를 죽어라 사랑하고 싶은데

가장 절실한 말을 몰라 허둥대던 날

글 쓰고 책 읽기도 시큰둥한 날

무작정 차를 몰고 서해로 갔네

해 뜨고 진눈깨비 내리는 진창길

그대 만날까 싶어 차를 몰았네

인륜도 아니고 불륜도 아닌

정치도 아니고 치정도 아닌

내 마음이 발뻗는 외로움의 끝

그 적막한 뒤란 어딘가에는 필경

그대에게 가는 길 열릴까 싶어

마음과 몸이 함께 달렸네

썰물 다음 드러난 대부도 뻘밭

그 허망한 치부 어딘가에서도 혹시

착한 새끼 게 몇쯤 만날까 싶은 날

난바다를 달려온 물너울들이

내게 무슨 말하려 달려들다가 저런!

방파제에 온몸을 짓찧고 물러서는

물러섰다 또 덤벼드는 눈 시린 투신

물 맑은 치정을

 

 


 

 

임영조 시인 / 석류

 

 

그 무슨 치욕으로

이 악물고 침묵하던 복서가

이 가을 문득

금빛 주먹 한 방을 날려

천하를 제패하는 순간이다.

그 가슴 벅찬 희열에 들떠

비로소 터뜨리는 홍소(哄笑)다.

보라.

저 찬란한 파열음 사이

아프게 베어드는 피멍울

오, 상처뿐인 영광을

 

 


 

 

임영조 시인 / 석류부처

 

 

가을 하늘 너무 높고 고요해

머리 숙여 내내 묵념하던 석류가

내심은 따분하고 심심했는지

입이 쩍 찢어지게 하품을 한다

 

엿보이는 입술 사이로

붉게 물든 치아가 가지런하다

이제 막 스케일링 끝낸 듯

얼얼한 통증이 가을볕에 부시다

 

아픔도 터지면 빛이 되는가

지난 시절 몰래 입은 상처들

영혼의 가마에 구워 빚은 사리다

비로소 천하에 내보이는 홍보석

최후에 발설하는 눈부신 말씀이다

 

자, 보라! 스스로 두개골 쪼개

주옥처럼 알알이 빛나는 언어

불씨처럼 잘 여문 시의 향기를

지상에 쏟아놓는 석류 부처여

온몸으로 쓴 시는 상처도 큰가

 

이 가을이 다 가도 나는

세상에 선뜻 내보일 게 없는데

계를 받듯 삼가 황홀한 불두

또 한 짐의 빚을 얻는다

 


 

임영조(任永祚) 시인(1945년~2003년)

1945년 충남 보령 출생. 중학교 시절 지리교사로 부임한 신동엽 시인을 만나 문학공부를 시작해 서라벌예대를 거쳐 1970년 「월간 문학」 신인상과 19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잇따라 당선되며 등단. 시집 [바람이 남긴 은어] [그림자를 지우며] [갈대는 배후가 없다] 등. 시선집 [흔들리는 보리밭] 1989 제23회 잡지언론상 수상. 1991 제1회 서라벌문학상 수상. 제38회 현대문학상 수상. 1995년도 제9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2003년 5얼 28일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