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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갑수 시인 / 석남사 단풍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9.

최갑수 시인 / 석남사 단풍

 

 

단풍만 보다 왔습니다

 

당신은 없고요, 나는

석남사 뒤뜰

바람에 쓸리는 단풍잎만 바라보다

하아, 저것들이 꼭 내 마음만 같아야

어찌할 줄 모르는 내 마음만 같아야

저물 무렵까지 나는

석남사 뒤뜰에 고인 늦가을처럼

아무 말도 못 한 채 얼굴만 붉히다

단풍만 사랑하다

돌아왔을 따름입니다

 

당신은 없고요

 

 


 

 

최갑수 시인 / 밀물여인숙 1

 

 

더 춥다

1월과 2월은

언제나 저녁부터 시작되고

그 언저리

불도 들지 않는 방

외진 몸과 외진 몸 사이

하루에도 몇 번씩

높은 물이랑이 친다

참 많이도 돌아다녔어요,

집 나선 지 이태째라는 참머리 계집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며

부서진 손톱으로

달을 새긴다

장판 깊이 박히는 수많은 달

외항을 헤매이는 고동 소리가

아련하게 문턱까지 밀리고

자거라,

깨지 말고 꼭꼭 자거라

불 끄고 설움도 끄고

집도 절도 없는 마음 하나 더

단정히 머리 빗으며

창 밖 어둠을

이마까지 당겨 덮는다

 

 


 

 

최갑수 시인 / 당신의 솔을 따라

 

 

당신이 와서

건반 하나를 누르고 갔다

야자나무 잎이 흔들렸다,

솔…

 

바람이 지그시 지구를 밀고 있다

 

당신은 여행이거나 저녁이거나

당신은 낮은 목소리여서

어디까지 왔나,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당신은

해변을 걸어갔다

 

솔 음의 발자국을 쫓아

당신을 따라가던 나는

음악을 알고

별을 알고

인생을 하찮게 여기는 솔의 기쁨도 알아버렸는데

 

파도 앞에서

어떤 지워지는 이름 하나를 써보곤

그 지워지는 모습이 아름답기도 하여서

또는 허망하기도 하여서

당신이 흔들고 간 야자수 아래에서

졸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파도 같은 솔,

그 솔이 다시 오길 기다렸는데

 

잠든 당신의 등뼈에 귀를 갖다 댄 적이 있었다

당신을 솔을 휘파람 불며

몰래 삶을 사랑한 적이 있었다

 

- 녹색평론 162(2018년 9-10월, p139~140),

 


 

최갑수 시인

1973년 경남 김해 출생.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7년 <문학동네> 하계문예공모에 <밀물여인숙1> 외 5편이 당성되어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단 한 번의 사랑>(2000년 문학동네). 여행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