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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시인 / 석남사 단풍
단풍만 보다 왔습니다
당신은 없고요, 나는 석남사 뒤뜰 바람에 쓸리는 단풍잎만 바라보다 하아, 저것들이 꼭 내 마음만 같아야 어찌할 줄 모르는 내 마음만 같아야 저물 무렵까지 나는 석남사 뒤뜰에 고인 늦가을처럼 아무 말도 못 한 채 얼굴만 붉히다 단풍만 사랑하다 돌아왔을 따름입니다
당신은 없고요
최갑수 시인 / 밀물여인숙 1
더 춥다 1월과 2월은 언제나 저녁부터 시작되고 그 언저리 불도 들지 않는 방 외진 몸과 외진 몸 사이 하루에도 몇 번씩 높은 물이랑이 친다 참 많이도 돌아다녔어요, 집 나선 지 이태째라는 참머리 계집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며 부서진 손톱으로 달을 새긴다 장판 깊이 박히는 수많은 달 외항을 헤매이는 고동 소리가 아련하게 문턱까지 밀리고 자거라, 깨지 말고 꼭꼭 자거라 불 끄고 설움도 끄고 집도 절도 없는 마음 하나 더 단정히 머리 빗으며 창 밖 어둠을 이마까지 당겨 덮는다
최갑수 시인 / 당신의 솔을 따라
당신이 와서 건반 하나를 누르고 갔다 야자나무 잎이 흔들렸다, 솔…
바람이 지그시 지구를 밀고 있다
당신은 여행이거나 저녁이거나 당신은 낮은 목소리여서 어디까지 왔나,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당신은 해변을 걸어갔다
솔 음의 발자국을 쫓아 당신을 따라가던 나는 음악을 알고 별을 알고 인생을 하찮게 여기는 솔의 기쁨도 알아버렸는데
파도 앞에서 어떤 지워지는 이름 하나를 써보곤 그 지워지는 모습이 아름답기도 하여서 또는 허망하기도 하여서 당신이 흔들고 간 야자수 아래에서 졸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파도 같은 솔, 그 솔이 다시 오길 기다렸는데
잠든 당신의 등뼈에 귀를 갖다 댄 적이 있었다 당신을 솔을 휘파람 불며 몰래 삶을 사랑한 적이 있었다
- 녹색평론 162(2018년 9-10월, p13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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