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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태 시인 / 바람분교
조롱고개 넘어 샛말 내린천에 몸 섞는 방동약수 건너 쉬엄쉬엄 쇠나드리 바람분교 노는 아이 하나 없는 하루 종일 운동장엔 책 읽는 소녀 혼자 고적하다 아이들보다 웃자란 망초꽃이 새들을 불러 모아 와, 하고 몰려다녀도 석고의 책장은 넘어가지 않는다 딱딱한 글자를 삼키려는지 친구들의 돌아오는 발꿈치를 읽으려는지 종이 울리지 않아도 꼬박꼬박 아침 해와 등교했다 하교하는 분교 독서를 즐기는 저 소녀는 나뭇잎을 읽고 꽃을 읽고 성큼 붉어지는 하늘마저 읽는다 철봉대에 촘촘히 짜 내려가는 땅거미 빈 걸상에 앉은 바람이 책가방을 싸고 교문 밖에선 산나리와 패랭이가 꼬드겨도 낮에 읽은 구절에 어둠이 한 겹 덮일 뿐 눈이 동그란 새들마저 하나둘 하교하고 밤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처음처럼 스러지는 폐교 소녀는 마침내 별빛 한 장을 넘긴다
한승태 시인 / 이장(移葬)
한여름 윤달이 뜨고 한 가지에서 뻗어나간 가족들이 저승과 이승을 가로질러 한자리에 모였다 상남의 산골에서 내려오신 할아버지와 내린천 골짜기에서 나오신 작은할머니 성남의 시립묘지에서 오신 큰아버지 내외분 제일 가까운 해안의 뒷골목에서 유골 대신 몇 가닥의 머리카락만 보내오신 큰할머니와 공원묘지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
사촌 형들은 말없이 구멍을 팠다 야트막한 산은 마치 여자의 음부처럼 둔덕이었다 지관은 음택이라고 했다 나는 그게 왠지 음핵처럼 들렸다
잣나무 그늘에 누워 뼈를 말리는 망자들 나는 검불을 긁어모았다 여기저기 떨어진 삭정이는 꼭 집 떠난 큰할머니의 뼈 같았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신 걸까요, 할아버지 알 수 없는 작은 벌레들이 그 나뭇가지를 갉으며 아기처럼 울었다
패찰을 든 지관의 말에 따라 망자는 다시 동서남북을 가려 누웠다 망자의 집이 꼭 애기집 같았다
아내의 뱃속에서 둘째가 자꾸 발길질을 했다
『현대문학』 (2002) 6월호 신인 추천 시
한승태 시인 / 나는 노새다
상상의 동물이 아니다
노새는 암말과 수탕나귀 사이에서 난 튀기다 수말과 암탕나귀 사이에서 나온 새끼는 버새다 노새와 버새는 새끼를 낳지 못하는 불구다 크기는 말만 하나 생김새는 당나귀를 닮았다 한때 노동 세계에서 힘깨나 쓰는 것으로 인기였다 몸은 튼튼하고 아무거나 잘 먹고 변덕 심한 주인도 잘 견디어 정신병에 걸리는 일도 없다 말없이 무거운 짐과 외로운 길도 능히 견딘다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이다
―『사소한 구원』(천년의시작, 2020)
한승태 시인 / 와우蝸牛
일만 년의 시간을 끌고 나와 충분히 미련할 줄 알고 대지의 연한 입술만 더듬는 그를 때를 기다려 밭 가는 맨발의 황소 라고 부르자, 농경민족의 기억 속에만 무럭무럭 자라나는 햇살가시나무처럼 바람의 워낭 소리 낭자하고 온통 무료의 양식으로만 자라는 이파리 뒤에 숨어 구름이 몸을 뒤척일 때마다 풀숲에 이랑을 내고 웅덩이를 파고 불알 덜렁대며 이슬을 갈아엎는 청동기 속의 따비가 되어 논길로 걸어가는 머리에 이고 가는 고봉처럼 꾹꾹 눌린 봄볕 한 숟가락 푹 떠 혀끝으로 밀어 넣으면 목숨 한끝이 꿀럭꿀럭이다가 바늘 다발로 올라오던 어둔 생목도 한가득 내려가서 대지의 몸을 환하게 열어젖히고 꿈틀꿈틀하는 것이다
-『바람분교』(천년의시작,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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