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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 시인 / 구름이 지나가는 오후의 상상
웅크린 자세를 배웁니다 어쩔 수 없는 마음을 자르고 말입니다 맹수의 이빨이라도 순하게 길들일 준비 또한 되어 있습니다 햇빛에 비틀거리던 거리를 그림 속에 가두고 싶습니까 트렁크를 열면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의자에게 바게트 빵이라도 뜯어먹자고 제안해 봅시다 잼이 묻은 칼은 베어 먹어도 좋습니다 굴러가기 싫다면 흘러가십시오 흘러가기 싫다면 원하는 방향으로 대륙을 이동시킵시다 등 뒤에서 새로운 버섯이 솟아납니다
최인숙 시인 / 징검다리의 사상
돌을 띄엄띄엄 놓아본다 물속 돌의 얼굴도 바로잡아 준다 서로 부딪쳐 깨어진 모서리 뿌리내리지 못한 중심을 흔들 때 무던한 표정에 눈이 시리다 손을 담근다 골목의 라일락 향 소꿉놀이하는 아이 종이배 기우뚱거리다가 기억 속으로 가라앉는다 돌은 중심 잃은 발을 바로잡아주고 물은 그 돌을 감싸고 돈다 물속에서 어머니가 나를 바라본다 탁탁 털어 널던 마당의 하얀 홑이불 그 이불 속에서 손가락 빨던 불안도 물에 떠내려간다 그러고 보면 징검다리는 나를 업어 건네는 등이었다는 생각 시린 곳을 채워준 단추였다는 생각 그 잠기지 않는 윗도리를 이제 다시 한 번 쓰다듬는다 누군가 징검다리 되기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다
-시집 『구름이 지나가는 오후의 상상』 (2017. 9)에서
최인숙 시인 / 서로를 떠도는 중이다
구름 밖으로 떠돈다
구름은 구름을 벗어나려 하고 구름 속에 손을 넣으면 싱싱하다 감추어진 것들이 흩어졌다 모인다
구름을 흔들어 보면 누군가의 놀란 눈동자와 만지작거렸던 손가락 망설이던 골목이 굴러다니고 차가워진 시간의 파편들이 반짝인다
구름이 구름을 잡아당긴다 구름의 이마 구름의 입술 물컹거리는 구름의 감정
구름이란 곳에는 두 개의 심장이 어울린다
내가 아는 너의 구름과 네가 아는 나의 구름 사이 붉은 노을이 스며들 때까지 우리는 좀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떠도는 중이다
계간 <다층> 2014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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