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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애란 시인 / 거꾸로, 거꾸로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6.

최애란 시인 / 거꾸로, 거꾸로

 

 

이천 년을 살아온 바오바브나무 보러

본 듯한 길, 물어물어 두 시간째 더듬고 있다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몸, 물어물어 걸어가는 길

남은 인생길도 물어물어 다듬고 가라는 듯

숲에서 나온 임팔라는 잠베지강물 쪽으로 사라지고

어린 왕자는 소행성 땡볕 속으로

 

자꾸 나를 밀어 넣었다

 

신이 실수로 거꾸로 심었다는 바오바브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나무의 뿌리를 보러 가는 거다

뿌리 없는 나무 없다, 면

근본을 보겠다는 거다

오랜 시간 키워온 그리움마저

여기로 데려온 걸 보면

거꾸로 서서

거꾸로 보는 나를 바로 세우기 위함일 거다

 

 


 

 

최애란 시인 / 나를 쳐내다

 

 

활짝 핀 더위에

바그다드 카페가 문을 열었다

모하비 사막에서 불어온 바람은

한낮을 흔들고

한낮의 그늘을 흔들고

한밤의 그늘까지 흔들어 놓았다

활짝 핀 더위와

정면으로 대치하던 나는

냅다 더위 먹은 문장을 풀어놓는다

놓쳐버린 모래의 문장은

불거진 바람이 짚고 지나가리라

더위에 절인 나를

기웃거리는 바람의 문장

서둘러 걸쇠를 건다

오늘도 빗줄기 한 자락 기다리며

구름 두어 자락 풀어놓았다

 

 


 

 

최애란 시인 / 나비의 반란

 

 

정직한 반나절이 삭제되었다

생애 일부가 지워진 건가

땀 흘린 사내와 함께 편집 당한 동굴

장애를 복구하려는 듯 끊어진 기억 속으로

길고 깜깜한 동굴의 시간 이어간다

동굴을 잡아먹은 달팽이관만 윙윙댈 뿐

 

끝내 미궁에 빠지고

꼬리명주나비가 불려왔다

하늘길 더듬던 긴 꼬리가

바람길 지워 버린 붉은 띠무늬가

쪼그려 앉은 길바닥이

틈새를 비집고 끼어드는데

동굴 입구는 어디쯤

 

삼거리, 행복은 덤으로 줄 것만 같은 행복 플러스 편의점

익숙한 듯 생애 일부를 지우고

다시 쓰던 취업 준비생처럼

동굴 같은 어둠은 삭제하고 싶었던 걸까

삭제된 동굴 밖으로 박제된 나비가 끌고 가는,

 

 


 

 

최애란 시인 / 물고기의 힘

 

 

일 년에 단 한번

허락된 십오 분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그 옛날 조상의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메기 사냥을 한다 사막

한가운데서 벌이는 전투

족장의 명령이 떨어지면 도곤족*의 후예

수천 명이 말라붙은 호수로 뛰어든다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생애

진흙탕 마음의 빚 대신

진흙을 뒤집어쓰고

물고길 잡는다

진흙 반 메기 반

입에도 물고기다

한날 한뜻으로 엉긴

해탈의 십오 분

 

정작 호수를 내어 준

물고기만 해탈에 이르지 못해 팔딱거리고 있다

 

*서아프리카 말리의 고원 지역에 사는 소수 민족

 

 


 

 

최애란 시인 / 불안을 우려내다

 

 

오후 한 시의 무기력을 들여앉힌 다관이 오후 두 시의 희망을 잡고 흘러간다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풀어놓은 어린잎의 향기에 사랑스러운 꿈이 얹혀 흥얼흥얼 따라 부르다 창문 너머 미끄러지는 눈발 따라 흩어진다 흩어진 꿈은 무작정 걷다가 삼계리 고샅길에 내려앉고 마을 뒷산 봉분 고봉밥에 내려앉고 눈꽃 내린 머리칼에 내려앉고 어디로 갈까 뒤적이다 불안을 우려낸

 

오후 세 시에 들어앉았다 직각으로 꺾여 만날 수 없는 꿈은 예각으로 치닫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폭설은 지워버린 꿈처럼 일터로 가는 좁은 길을 지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자국을 지우고 사거리 고장 나지 않은 신호등을 지우고 세상의 얼룩을 지우고는

 

덮는다 덮을수록 세상은 깨끗하다 못해 눈부시다 덮어서 빛나는 의혹들 그림자가 길을 붙들고 투덜댄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깍재깍 제때 다다르던 시침이 빗나간 예보처럼 시치미를 뗀다

 

폭설로 길 끊어진 오후 아홉 시

가슴까지 탁 트인 새길은

두 팔 한껏 벌리며 제동을 건다

앞서가며 펼치고 꺾었을 꿈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속도를 줄이지만

속보로 떠오른 의혹처럼

 

납작 내려앉은 하늘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최애란 시인 / 내 꽃을 따다

 

 

양떼구름이 양떼를 몰고

양떼가 낮 한때를 밀고 가는 오후

주거니 받거니 바통을 이어가며

이어달리기를 하는 중이다

 

‘양꽃이 간다’

양껏, 양꽃을 빨아들이다

불쑥, 대장금 간판이 떠올랐다

불길한 예감은 내 뒤통수에

올라앉아 입맛을 다시고

꽃을 꺾어 가차 없이 일렬로 세운다

꽃이거나 꼬치거나

 

양떼가 놀러 나간 하늘을 올려다보니

양떼구름이 하얗게

질려

양떼를 데려가고 있었다

 

 


 

 

최애란 시인 / 수상한 골목길

 

 

배부른 동창들

빈 둥지는 수다로 채울 요량이다

오지 못한 그녀 근황을 잘근잘근

씹으며 허전함을 달랜다 입방아에

인기 스타가 된 그녀

잘 익은 수박 보다 농익었다

별미에 하나가 되어 가뭄에서 경제까지

건성건성 나라 걱정 보태며

정작 달콤함의 근원은 야멸치게 뱉어내는데

문득 타들어 간 그녀, 새까만 속처럼 보여

얼른 덮어 두었다 모호한 것들이 대책 없이

꽃을 피우는 수상한 저녁

제동이 걸리지 않는 생태계의 교란에

나도 한몫한 것 같아 돌아오는 길

뒤를 밟는 건 그림자뿐 인데도

잰걸음으로 앞만 보고 걸었다

 

내 목구멍 같은 골목길을 겨우 빠져나왔다

 

 


 

 

최애란 시인 / 그만, 좀

 

 

툭,

온통 사랑이라고 쓰는 저 통 문장을

 

나는

그만, 좀이라고 읽는다

 

바로 이전의 문장은

핏빛 베어 문 동박새

 

아,

선연한

 

몸빛 너머

쪽빛 바다

 

쉴 새 없이

핏빛 행간을 뒤적이고 있다

 

툭,

 

 


 

최애란(崔愛蘭) 시인

대구에서 출생. 경북대학교 및 同 대학원 졸업. 2006년《심상》으로 등단. 2000년 <인터넷 문학상> 작품공모에 '가을배추'로 대상 수상. 2019년 대구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선정.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심상>시인회 회원. 현 달성문인협회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