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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현호 시인 / 나라는 시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6.

이현호 시인 / 나라는 시간

 

 

누군가 내 심장을 한입 베어 먹었을 때

한입만큼 비어버린 심장을 버렸을 때

산다는 것이 죽음을 참는 일일 때

지구가 외계인의 성경 속 지옥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악마들의 천국이 여기가 아니라고

이상한 질문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때

영혼은 영혼, 천사는 천사, 당신은 당신

인제 세상에는 아무런 비유도 필요가 없을 때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에게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을 때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에게 새로 가르쳐줄 것이 없을 때

어제부터 너를 사랑하겠어 내일은 너를 사랑했어 지금 너를 사랑했었어

그 사랑을 사랑했어

오래 들여다보아도 손댈 수 없는 비문만이 남을 때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우리는 서로 병이 깊다고만 생각될 때

기도를 그치는 영혼을 꿈꿀 때

영혼을 그치는 기도를 올릴 때

거울에 비친 눈동자가 한쪽에는 죽은 신이 다른 한쪽에서는 당신의 뒷모습이 앉아 있을 때

내가 신을 닮아갈 때 점점 세상에서 달아날 때

밤하늘에 백반증 같은 눈이 내릴 때

별은 밤의 사리(舍利) 같을 때

가벼워진 심장으로 소복이 눈이 쌓일 때

나도 한 마음의 인간일 때

 

 


 

 

이현호 시인 / 마라톤

 

 

내가 조깅을 한다면

술이나 끊어 바보야, 너는 웃겠지

 

밤 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똥별 같은

그 미소가 좋아

운동화 끈을 조인다

 

산책로 외야수처럼 서 있는

가로수들, 금방이라도 뿌리를 들고

뛰쳐나갈 것처럼

 

왜 야수처럼 서 있나

 

부푸는 폐를 안고 나무 사이를 달린다

불타는 꼬리를 끌고 태양 주위를 운행하는 혜성이

나의 주법(走法)

 

천천히 뛰어 바보야, 너는 웃겠지

나는 천천히 그래서 달린다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 이현호 시집 중에서

 

 


 

이현호 시인

1983년 충남 전의에서 출생. 2007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라이터 좀 빌립시다>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