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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주 시인 / 보행 시간 35초
고양이가 신호등을 기다리다 길을 건너고 박스가 떨어지고 폐지 줍는 할아버지가 건널목에서 멈칫하고 고양이가 쳐다보고 종이를 피해 가고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가면 집이 있나 길로부터 또 다른 길 이쪽에서 저쪽으로 집 아닌 곳에서 집 아닌 곳으로 이어지는 길에 위험한 횡단보도가 너무 많아 초록 불은 기다림이 짧아 고양이와 리어카가 나란히 건너는데 오늘을 통과한 바람은 조금 더 건조해져서 건조한 종이 위에 작은 무게를 보태서 할아버 지를 따라가는데 수레가 무거울수록 집이 가까워지나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면 골목길은 덜 으슥해지고 사람들은 우호적이 되나 사람들은 종이를 밟지 않고 꼬리를 밟지 않고 먹을 것을 좀 주고 꼬릴 잡고 돌리지 않고 종이를 찢으면 꽃가루처럼 꽃길이 펼쳐지나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모두 바쁘게 집으로 향할 때 길에서 또 다른 길로 이어진 남부순환로 이 도로만 건너면 집에 가까워질 거라고 믿는 생각이 너무 순진해서 정사각형 모양으로 차례차례 켜지는 횡단보도를 뱅글뱅글 돌아 건너 또 건너고 다시 그 자리에서 초록 불을 기다리네 깜빡깜빡 반대편에서 나를 기다리는 고양이와 눈이 마주치네 우리의 첫 번째 눈 키스 해가 지는데 나도 밤이 무서운데 멈추고 싶은데 멈추고 싶지 않은 장황한 걸음 다들 1등으로 집에 도착하는데 누구보다 빨랐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고 안에서 아무 소리가 나지 않네 우리 집이 맞는데
웹진 『시인광장』 2021년 12월호 발표
차현주 시인 / 살았다
뜬장에서 개들이 살았다 나디아가 술을 먹다 죽다 살았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돌이 꼭대기 층에서 살았다 살았다의 미래는 죽었다 죽다 살아난 사람은 미래에서 온 사람 예지자는 그런 이유로 추앙받는다 살았다는 동사가 아닌 감탄사 식물이 해 아래서 드디어 살아났다 음지 식물이 음지에서 죽었다 방에서 살았다 거기서 나디아는 잘 안 살았다 급기야 죽었다 나오지 못하고 죽어서 6달 뒤에 다시 태어났다 살았다는 기쁨으로 쌀을 먹었다 밥이 되지 못한 발음을 먹었다 묵음을 기꺼이 해석했다 롤러코스터에서 내려온 바지의 혁대가 풀려서 쓸개가 헐거웠다 방문을 봉한 굵은 스티치 문을 벌컥 열고 실밥을 귀 뒤로 넘겨 도도하게 방문을 나서면너는 살았구나 하는 소리 신은 계속 말했지 너는 살아있다 감사하라 내가 살면 다른 사람이 죽는가요? 제로섬게임은 이미 지난 유행
올해는 청귤이 열렸다 작년에는 청귤이 안 열렸고 나디아는 작년부터 지금까지 살아있다
밤에 죽은 사람이 낮에도 살 리 없다 그래서 나디아는 자주 동사를 감탄했다 방에서 나온 직후부터 죽은 대부분의 나디아를 위해 산 나디아가 열심히 밥을 씹었다 이제 살았다 드디어 살았다!
웹진 『시인광장』 2021년 6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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