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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태관 시인 / 나라는 타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0.

이태관 시인 / 나라는 타자

 

 

나는 고뇌하는 수도승

바람 많은 언덕에 탑을 세우고

세상이 들려주는 이야기 듣기 위해

문패는 하늘에 걸어두었지

온 몸이 십자가인 가지 위

나뭇잎 등잔 하나 매달고

또로록 개암나무 열매 굴리면 하루가 가지

 

바다를 향한 파란 신호등 너머

장례식장의 불빛은 밝기도 하지

썰물 때에 맞춰

하루 두 번

집을 지어야 하는 무명의 생도 있지

 

옛집은 아득히 멀고

그곳엔

미처 도시로 떠나지 못한 등 굽은

소나무 하나

주문처럼 서 있지

 

바람은 불어왔다 가지

나는 수도승

숭숭 구멍 뚫린 생도

한여름엔 시원키도 하지

젖은 옷가지 널어 말리는

줄탁의 시간

부리 하나로 하늘에 칼금을 긋는--

 

 


 

 

이태관 시인 / 마음을 내려놓다

 

 

신발장 속,

먼지 내려앉은

낡은 구두 하나 보았습니다

닳아 제 키보다 낮아진

낮아진 만큼 겸손해진

땅과 물의 온기를 제 주인에게 전할 줄도 아는

차마 버리기 아까워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해안선을 걸으며

뒹구는 돌

그 중 눈 맞춘 몇 놈

배낭에 넣었습니다

무거워져 오는 어깨

순간,

집안 어느 곳을 뒹굴고 있을

기념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씩 집어왔을

돌덩이들을 생각했습니다

차마 버리지 못한

나의 구도 하나 생각났습니다

배낭 속 돌덩이를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저리도 붉은 기억』, 이태관, 천년의 시작, 2003,

 

 


 

이태관 시인

1964년 대전에서 출생. 1990년 《대전일보》신춘문예 당선. 1994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시집으로 『저리도 붉은 기억』(천년의시작, 2003)과 『사이에서 서성이다』 (문학의전당, 2010) 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