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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오 시인 / 독주회
손목을 보고 나서 시계를 두고 왔다는 사실을 안다
거대한 홀의 입구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나를 지나친다
등 뒤에는 지하로 이어진 공연장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무대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층마다 좌석이 들어차 있을 것이고
비슷한 모습의 관객들이 무대를 향해 앉아 있을 것이다
문을 열면
한 방향으로 늘어선 검은 머리들을 지나쳐야 한다
입구 안에는 둥글고 깊은 어둠이 가득하겠지 사람들은 나를 지나쳐 그곳으로 간다
가장 낮은 곳에 한 대의 피아노가 빛나고 있는 곳으로
그가 오지 않는 동안에도 지하에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
연주자가 양손을 들어 올린다 건반이 잠시 얼어붙는다
나는 두리번거린다 팔짱을 끼고 발을 까딱거리며
문이 닫히기 시작한다
김선오 시인 / 나이트 사커
축구를 멈출 수 없었다 맨발로 공을 찼다 골대가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가로등에 흰 양말이 걸려 있었다
운동장으로 끊임없이 공책이 날아왔다 끊임없이 발목이 꺾였다 창문에서 붕대가 쏟아져 내렸다
너를 넘어뜨리고
공을 높게 찼다 공 맞은 가로등에 불이 꺼졌다 고개를 꺾고 하늘을 보고 공이 떨어지기를 기다렸지만 발등 위로 새가 떨어졌다
톡톡 새를 찼다 얼룩무늬 새는 나의 발동작대로 힘없이 날아올랐다가 다시 발등에 머무르기를 반복했다 공은 어딨니 공을 데려와 새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프니 눈 좀 떠봐
공책이 날아오고 온몸에 붕대를 감은 네가 달려오고 육각형이 굴러오고 잔디가 들썩이고
발등에서 툭 굴러떨어지는 새
이 정도 부상이면 충분한 것 같다 우리 그만하자
어느새 터진 공 속에 새를 넣고, 어디에 묻지, 두리번거리면 등 뒤에서 여기라고, 이쪽으로 패스하라고
김선오 시인 / 사랑 없음 입장하세요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네가 쓰던 시나리오를 이어 쓰고 있었다
여기 오기 전까지 뭘 했더라
나는 흰 방에 갇혀 있기로 한 모양이야 미간을 찌푸린 채 연필을 쥐고
눈을 가늘게 뜨면, 흰 방의 완벽을 위해 창밖에도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다
영화는 하나의 사랑이 어떻게 다른 사랑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었고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벌어지는 여름의 축제를 배경 삼고 있었으며 자전적 요소가 많았으나 그것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촌스럽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런가, 나는 연필 끝으로 관자놀이를 긁고
문장을 마무리하기 위해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니까 축제가 끝나고 비둘기만 남은 광장에서, 지는 해를 등진 사람들의 그림자를 우리가 바라보면서, 문득 들어간 아랍풍 카페에서, 누군가 다가와 당신들의 이야기를 제가 적어도 되겠습니까 물어본 이야기
백발의 노인인지 민머리 젊은이인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앉은 곳이 원형 테이블 앞인지 바닥 위인지 그것 역시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쩍게 웃으며 적을 만한 이야기는 없을 거라고, 아무래도 자리를 비켜주시면 좋겠다고 공손히 말했고
그곳에서 시나리오는 멈춰 있었다
여기부터 쓰면 되는 건가
그러나 나는 모르는 나라에 문득 떨어진 이야기, 보드게임 같은 이야기, 불청객을 죽이고 그를 구워 먹는 일이 안심 스테이크를 먹는 일보다 낫다고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 유령의 불면증 이야기, 불타버린 광장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
그런 것들을 쓰고 싶었어
사랑이 다른 사랑을 구워먹지 않고, 다른 사랑은 한 사랑의 없음을 설파하고, 우리가 하는 말이 검은 글자가 되고, 그런 거 말고
사랑이 자꾸 원시적이 되는 그런 거 아랍풍 카페 말고 축제 말고
다음 대사를 적어야 하는데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것들을 생각하느라 너의 글을 모조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면 완전히 다른 내용일 거야
눈밭 위에 셀 수 없이 많은 책상이 놓여 있듯이
첫 페이지로 돌아가자 영화는 어느 불 꺼진 방의 문 밖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잿더미가 된 세상 새카맣게 탄 야자수가 툭 부러지는 장면
아직 없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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