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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성백 시인 / 그레타 툰베리에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1.

김성백 시인 / 그레타 툰베리에게

 

 

석유화학제품을 몸에 두르고 일회용품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면서 호화로운 요트를 타면서, 탄소배출의 혜택을 다 받고 자란 네가 남 탓만 하는, 공업강국 스웨덴 상류층 백인 소녀의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찬 결기와 귀족행보를 보면서, 아저씨는 생각한다

‘넌 성공했구나. 지구촌 스타가 되었구나. 일류대학 가겠구나. 돈 걱정 없겠구나. 정치하겠구나. 팔자 폈구나.’

법정처럼 이태석처럼 언행일치하라는 말은 아니지만

그린피스에서 평생 봉사하라는 말은 아니지만

자전거와 돛단배만 타고 다니라는 말은 아니지만

너의 말은 빨대 하나 생분해하지 못한다

How dare you!

가해자가 피해자 코스프레 하는 너의 연설을 보면서

너의 배후세력과 퍼포먼스의 진정성을 의심하면서

아저씨는 왜 자꾸 씁쓸해지는지

월든의 자연주의자도 티베트의 승려도 아니면서

아마존 소수민족의 추장 딸도 아니면서

국토가 물에 잠긴 섬나라의 기후난민도 아니면서

지구파괴의 책임을 남에게만 묻다니

누가 누구에게 큰 소리를

How dare you!

국제기구를 아이돌처럼 방문하기보다는

저개발국가의 피해자 아이들에게 먼저 사과하렴

너희 동네에서만 조용히 실천하기를 동방의 작은 나라에 사는

유색인종 아저씨는 당부한다

채식주의와 플라이트 셰임(Flight shame)은 포기하지 않기를

가해자가 가해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란 경고의 목소리란

태평양의 쓰레기 섬처럼 둥둥 떠다니는 아이러니

두고 보기 힘든 자화자찬 낯 뜨거운 헤게모니라는 것을

볼륨과 자세를 낮추고 너희부터 반성하고 뉘우치길

그리하면 아저씨는 너희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너희 행보를 도우리라 함께 싸우리라

간디도 못 받은 노벨평화상은 부디 잊기를

How dare you!

물고기는 물에 젖지 않고

새는 구름에 젖지 않지만

사람은 강물에 젖고 빗물에 젖는다

연잎처럼 부레옥잠처럼 길을 길에서 찾지 말기를

새가 나는 이유는 땅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님을

자연은 반짝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침략자가 침략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파괴자가 파괴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부자가 사치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노인이 아집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오만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김성백 시인 / 사바나가설

 

 

달빛에 손목이 베일 듯 휘몽한 밤

네모난 별 하나 술잔 위에 떠오르니

그 몸 가득 연애편지를 담아

받는 이도 주소도 없는 먼 대륙으로 나는 띄운다

약속뿐인 이 세계에서

야간자율학습이 없던 시절

플라스틱이 없던 시절

고리대금이 없던 시절

마스크가 없던 시절

우체부와 인력거만 있던 시절로

멸종위기종 보고서와 함께 연꽃그늘을 나는 부친다

요령을 모르는 파도의 은빛 주파수에 실어

 

이길 수 없다면 엎드려라

아비가 일러준 유일한 가르침이었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싸우지 않고 이길 수는 없을까

홍적세의 풀밭 위를 구름처럼 두 발로 걸었다

곧은 허리와 자유로운 두 손은 마냥 비칠거렸고

요즘 들어 자주 나무 위로 번쩍이는 하늘의 흰 뿌리

뜨겁고 빨간 이글거림을 불이라 불렀던 우두머리의 아들

부러진 날 선 나뭇가지에 발바닥이 찢긴 아우의 비명을

돌멩이에 머리통을 맞고 쓰러진 하이에나를 나는 기억했다

치타처럼 빠를 수는 없지만 불이 붙은 나뭇가지만 있다면

하늘과 땅이 맞닿은 저기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그곳엔 굵은 비가 올지도 모르고

뱀도 모기도 독수리도 없고 뚱뚱한 나무가 걸어 다닐지도 모르지

마침 사자 한 놈이 달려들었을 때 나는

불붙은 나뭇가지를 녀석의 면상에 박아버렸고

눈알이 녹아버린 녀석은 두려움을 흘리며 왕관을 놓고 떠났다

불을 다스릴 수만 있다면 나는 왕이 될 수도 있을 거야

지평선을 향해 뛰고 또 뛰었지만 지평선은 그만큼 달아났다

뛰는 데 방해가 되었을까 내 꼬리를 나는 잘라버렸지

즐거움을 발명한 최초의 역진화

멸종전쟁의 시작이었다

 

첨단기능의 최신 폰을 찾는 나는

행성마다 한 명씩만 사는 다차원 플랫폼에서

간혹 더 넓은 은하로 옮기려는 거간꾼도 있지만

문단속이 필요 없는 홀로그램 세계에서

땅에 울타리를 치면서 시작된 눈물 젖은 도돌이표

행성 전부를 소유하여 파문당하지 않는 길가메시이거나

혼자 우상을 키우고 혼자 제물을 바치고 혼자 순교하는 최후의 샤먼이거나

세상 끝의 벌거숭이이거나

소외도 차별도 억울할 것도 없는 미노타우로스의 그림자

폰은 우주에서 인구밀도가 제일 높은 독방이라지

건너가지도 않고 건너오지도 못하는 바이오필리아

거꾸로 가는 수레바퀴는 오늘도 대멸절의 마디를 도모하였다

자전도 공전도 문패도 없이 네발짐승처럼 게걸스러운 식욕과

손안의 창백한 푸른 뇌와

인류세를 다 욱여넣은 팔림세스트와

추호의 눈속임도 없는 사바나의 요술램프와

 

 


 

김성백 시인

1970년 서울에서 출생. 건국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2018년 《시현실》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