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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효 시인 / 분명한 밤
밤이 되면 우리는 아는 곳에서만 놀았다
아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아는 맛을 느낄 때 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사람들에 섞여 무한히 이어지는 불빛 속으로 아는 사이라서 우리는 충분히 걸었다 걷고 있었다 그러다 모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부분적으로 의견이 없었고 전부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서로의 이름을 빼면 지어 줄 결론이 많다는 게 기뻤다
여태 쌓인 일들을 고민하는 동안 해야 할 일들이 차츰 첨예해졌다 과거를 떠올리면서 내일을 위한 용건을 기다렸다 우리가 천천히 따르던 골목의 눈빛
친구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두려움이 의구심에 닿아 있었다 많이 잃었다는 사실은 믿음에 가까워졌다 여전히 가지 못하는 곳이 생겨났지만
밤마다 우리는 아는 만큼 길어졌다 확신이 주머니처럼 가득해서 익숙한 곳이 늘어났는데 돌아갈 곳은 없었다
정영효 시인 / 계단
어쩐지 명분이 부족하다 처음에 언덕이 있었을 테고 누군가 언덕의 꼭대기에서 닿지 못하는 형상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무리를 바치는 제단이나 위인을 만드는 단상을 쌓았다면 거기로 통하는 계단은 무릎이 복종하는 입구였던 셈
말하자면 믿어서 멀어지는 위치를 부르기 위해 자신이라는 가장 좁은 근방을 갖겠다는 약속이 오래된 신전과 솟아오른 무덤 앞, 계단을 들어설 때 하는 인사였겠지만
왜 이곳은 겹겹이 덧댄 천장들로 가득한가 또 그 밑을 떠도는 발자국들은 왜 문 뒤에만 숨어버리는가
지붕 하나 지고 살다 무한을 바라던 자들에겐 해발을 풀어주는 계단이 지상의 간섭을 버릴 수 있는 막다른 자리 그러나 비밀도 맹세도 없이 나는 층층을 밟을수록 공중에 생긴 면적을 섬기면서 마지막 계단까지 이른 적은 드물다 통로가 빨려든 열쇠 구멍 너머 이름 모를 걸음을 듣고 종일 쥔 실마리를 놓친 채 자주 누웠으니 어떤 소문이 나를 두드리고 갈 것인가 비탈을 거닐다 주인을 잃은 헛것들
전구의 미색이 그림자를 거드는 계단 중간쯤에 두고 온 눈빛이 찬 기색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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