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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정옥 시인 / 담쟁이를 넘을 수 없나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1.
박정옥 시인 / 담쟁이를 넘을 수 없나

박정옥 시인 / 담쟁이를 넘을 수 없나

 

 

요즘 부쩍 돌담이 시끄럽다

안팎의 위치에 따라

남북으로 대치되는 돌담

 

조금씩 허물리는 담을 사이에 두고

말이 자라나는 겹겹의 입술이

돌담 사이 쑤셔 박혀 있다

 

쑤셔 박힌 말은 한줌 빗물에도

스프링처럼 튕겨나간다

 

저것은 풍자를 위한 계절의 과녁

 

푸름의 중심을 겨냥하여

곧이곧대로 넘어가려는 것과

허공에 창문을 가늠하는 것과

서로의 세계를 누르는 압력과

바람의 수평과

 

그러나 할 말이 많은

저 많은 청개구리들

파랗게 질리도록

돌담을 갈구어

비가 오면

정말

어쩌려고!

 

 


 

 

박정옥 시인 / 말 방

 

 

 캄캄한 입 속에서 급히 튀어 나온 말은 어둠입니다. 이목구비 또렷한 어둠 또한 고립입니다. 햇빛 차단된 식물성 몸짓으로 던지는 절벽입니다.

 

 입 속은 그러니까 말이 도배된 엄숙한 방으로 어제도 오늘도 그제도 추상적이게 네, 모난 방에 갇혀 도착을 모르고 간략한 일생이 되려합니다. 서사가 되려합니다.

 

 벽지처럼 서 있던 어떤 것은 불씨처럼 살아나 말과 말 사이 모방을 본뜨는 벽보가 되려합니다. 누구에게 얼굴이 되려합니다. 목소리를 끄려합니다. 그리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말의 뒤에 숨어 박수를 칩니다.

 박수를 받고 튀어버립니다

 

 


 

 

박정옥 시인 / 비 맞고 우는 고기

 

 

비 오는 날 만어사에

만 마리의 물고기

까맣게 몰려 반들거린다

스님의 강설을 듣고

몸으로 소리를 내는

내장 없는 어족들

부위마다 소리가 다른

일만 개의 타악기로

한참을 운다

만어사 경문이다

 

 


 

 

박정옥 시인 / 거대한 울음

 

 

통통해진 밤이 넘겨지고

오늘은 창밖이 훤하다

가로수 벚나무를 올려다보면

하늘은 깊은 호수가 돠고

벚나무는 개구리 알을 산란하느라 툭툭 끊겼다

 

사월을 부화하는 나무

알을 품어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계절을 꽝꽝 결박한 빙화氷花

파미르고원을 넘고

바이칼의 물을 품어

얼마나 먼 길을 울며 절며 왔을까

비로소 피가 엉긴 머뭇거림이 들린다

 

오늘밤 떼 창으로 잠 못 드는

저 울음 다 받아내는

이 봄이 쉬 늙겠다

 

 


 

 

박정옥 시인 / 워더링 하이츠

 

 

 오늘은 나를 도굴하는 밤이 될 거야 히스클리프. 축축한 애버딘의 은빛 화강암은 내 안에서 덜컥거리는 비탈길 아직 벼랑은 고요하군 널뛰는 무곡의 귀음을 타고 폭풍 속을 찔러보는 거야 어제로부터 비롯된 내일이 자꾸 어긋나 내안에 방치했던 정의의 도형은 모세에 자꾸 발목이 접혀 사월과 유월사이 세모꼴 함수관계는 오래 오. 래. 비바람 거세질 거야 그 난해한 문장과 공식을 정리하려면 서른 개의 몽블랑이 필요했던 거야 브레게 시계는 초점을 잃고 그들만의 시간은 푸른곰팡이로 가득 엉겼어 출구를 잃었어 무너져야 할 것들이 내 안에서 자꾸 층을 높여 이젠 폭풍을 구겨 넣고 황금열쇠로 잠궈 줘 가시 돋친 노란 밤송이만 먹으면 돼 바람은 어디로 방향을 튼 거야 검은 머릿결로 보랏빛 히스의 소로를 빠져 나갔니 적폐를 찾기 위해 나는 걸어야 했어 여기서 날 꺼내줄래? 멀고먼 서쪽의 제국 해뜨는 섬에 표류할 때까지

 

 


 

박정옥 시인

경남 거제 출생. 방송대 국어국문과 졸업.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석사 졸업. 2011년 《애지》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거대한 울음』이 있음. 변방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