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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영승 시인 / 반성 16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1.

김영승 시인 / 반성 16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김영승 시인 / 반성 83

 

 

예비군 편성 및 훈련 기피자 자수 기간이라고 쓴

자막이 화면에 나온다

나는 훈련을 기피한 적이 없는데도

괜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내가 무슨 잘못을 또 저질렀을지도 모른다고

어제나 그저께의 일들을 생각해 본다

나 같은 놈을 예비해 두어서 무얼 하겠다고

어김없이 예비군 통지서는 또 날아오는가.

후줄그레한 개구리옷을 입고

연탄불이나 갈고 있는 나 같은 놈을

나는 문득 자수하고 싶다

뭔가를 자수하고 싶다

 

 


 

 

김영승 시인 / 반성 163

 

 

코끼리들이 문득 가엾다

코끼리 발바닥에

어느 정도 두께의 굳은살이 박혔을까

그 거대한 몸뚱이를 지탱하며 먹이를 찾아

뛰어다닌 벌판

굳은살이라곤 입술과 유방과 성기밖에 없는

불행한 남녀들이 다투어 몰려온다

귀족적이려고 매력적이려고 그리고

지성적이려고 무지무지 애를 쓰고 있다

가엾다

 

 


 

 

김영승 시인 / 반성 190

 

 

쓸쓸하다,

사생활이 걸레 같고 그 인간성이 개판인

어떤 유능한 탈렌트가 고결한 인품과

깊은 사랑의 성자의 역할을 할 때처럼

역겹다

그리고 보통 살아가는 어리숙하고 착하고

가끔 밴댕이 소갈딱지 같기도 한 이런저런 모습의

평범한 서민 역할을 할 때처럼

그보다 훨씬 똑똑하고 세련된 그가

그보다 훨씬 자극적이고 도색적인 그가

수줍어한다거나 이웃에 대해서 작은

정을 베풀어 어쩌구저쩌구하는 역할을 할 때처럼

각자 아버지고 어머니고 선생이고 아내고,

어쨌든 이 무수한 탈렌트들과

나는 살아야 한다

 

 


 

 

김영승 시인 / 반성 685

 

 

아무리 아득할 만한 고통이라도 결국

내 이 한 젓가락도 안 나가는

육신 만의 것이 아니냐

까무라칠 것같은 황홀한 쾌락도

내 이 한 젓가락도 안 나가는

육신 만의 것이 아니냐

두 가지 다 참을 수 있는 게 아니냐

車에 치어 벌떡 일어나 뭐라고 뭐라고 뭐라고 몇 마디 한 뒤

금방 죽어 버린 그 머리통이 박살난 사나이처럼

교미가 끝나면 몰라몰라하며 죽어 버리는 그 숫놈 거미처럼

 

고통과 쾌락

 

이 두 가지 때문에 나는

무수한 형용사끼리의 박치기를 시키며

대가리 터져라

 

대다수 열악한 영혼을 소유한

소설가들이 쓴 그 어설픈 소설처럼

무슨 얘기를 기록하고 무슨 세월을

만들어내겠다고

 

(痛快)하다는 단어를 갖는

동물성 지방의 미끌거림 만큼 선정적인

곰털 가죽 빤스 입은 털복숭이

원시인 여자가 본 부라자처럼

(삶>이라는 명계백숙처럼 삶아진

개념을 갖고 살고 있는

멍청한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은 흰쥐의 위장을

내시경으로 찍은 필름엔

충혈 충혈 충혈 뒤

팍!

모세 혈관 파열

 

출렁출렁

피범벅.

 

 


 

 

김영승 시인 / 반성 743

 

 

키 작은 선풍기 그 건반 같은 하얀 스위치를

나는 그냥 발로 눌러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는 선풍기한테 미안했고

괴로왔다

 

     - 너무나 착한 짐승의 앞이빨 같은

    무릎 위에 놓인 가지런한 손 같은

 

형이 사다준

예쁜 소녀 같은 선풍기가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어린이 동화극에 나오는 착한 소녀 인형처럼 촛점 없는 눈으로

'아저씨 왜 그래요' '더우세요'

눈물 겹도록 착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얼 도와 줄 게 있다고 왼쪽엔

타임머까지 달고

좌우로 고개를 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더운 여름

반 지하의 내 방

그 잠수함을 움직이는 스크류는

선풍기

 

신축 교회 현장 그 공사판에서 그 머리 기름 바른 목사는

우리들 코에다 대고

까만 구두코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지시하고 있었다

 

선풍기를 발로 눌러 끄지 말자

공손하게 엎드려 두 손으로 끄자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을 닮았다

핵무기도 십자가도

콘돔도

 

이 비오는 밤

열심히 공갈빵을 굽는 아저씨의

   그 공갈빵 기계도.

 

 


 

 

김영승 시인 / 반성 745

 

 

죽기 직전에 자기 아들에게 만

알았느냐? 하고 죽었다는

옛날 장인들의 비법처럼

나도 그런 거 하나쯤은 갖고 있는가

 

반 관에 450원

국수를 삶으며

고려청자의 비색 같은

내 아픔의 연원

그 아득한 고대 문명의 발상지를

생각해 보며

 

시계를 차고도 늘

지각을 하는

노예들과

 

그리고 그렇게

입 다물고 오래 참을 순 없는가

 

당신을 사랑해요 혹시

텅 빈 구멍을 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결국

음흉하고 비열한 고백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이여 그대는

재림한다고 하지 말고 해결한다고 하라

재혼한다고 하지 말고 해결한다고 하라

글쎄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해결한다고 하라

 

이력서

뒷간에 갖다 붙여 놓으면

왼갖 잡다한 잡귀는 다 물러갈 것 같은

잡귀 쫓는 부적 같은

내 반명함판 사진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정성껏

결국 삐뚜로 붙여 놓고

 

자기소개서엔 '나는 천재다

나는 왜 그렇게 쓸 수 없는가

 

신문에서 오린 사원 모집 광고 문안엔 왜

식욕 있는 남녀, 성욕 들끓는 남녀

라는 자격 -

 

그자식들은 왜 나에게

자기네들의 소개서를 써서 보내지 않는가

 

아니면 '나는 미친 놈이다 으하하하하ㅡ'

아니면 숫제 '나는 나는 갈테야 연못으로 갈테야

동그라미 그리러 연못으로 갈테야 --------'

 

더러운 놈들.

 

 


 

 

김영승 시인 / 반성 827

 

 

한쪽 끈이 끊어진 슬립퍼를 끌고

아기죽 아기죽 아기죽 아기 족족 시온의 딸 같이

모가지를 늘이고 정을 통하는 눈으로 발로 쟁쟁한

소리를 내는 음분한 유혹하는 순 탕녀 요부 여자

또라이* 같이

 

변소에 들어가 조심조심 조심한답시고

살살 자세를 잡으려 돌아앉으려다가

에휴------

똥통 속에 한짝을 빠뜨렸다

 

어머니도 신고 형도 신는 슬립펀데

나는 막대기를 들고 엎드려

꺼내 놓았다

우주의 아득한 변방의 오지 같은

어느 깊고 깊은 썩은 사나이의 심오한 사상 같은

재래식 변소

 

X자로 엮어 네 귀퉁이를 꿰맨 슬립퍼

그 중 한 귀퉁이가 뜯어진 왼쪽 슬립퍼

 

비누로 깨끗이 씻어 냄새 맡아 보며 부뚜막에

세워 말리면서

그러면

뜯어진 걸 꿰맬까

아니면 한 짝마저 뜯어 버릴까

 

그랬던 것 아니냐

떠나간 내 아내야,

 

잠시 생각했다.

 

* 구약성서 이사야 3 : 16에서 전용.

 

 


 

김영승(金榮承) 시인

1959년 인천에서 출생.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졸업. 1986년 계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반성·시〉 외 3편의 시 를  발표하며  詩作  활동  시작. 시집으로 『차에 실려가는 차』,  『취객의 꿈』,  『아름다운 폐인』 ,  『몸 하나의 사랑』,『권태』,『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 『화창』, 『흐린 날 미사일』이 있음. 2002년 제3회 현대시작품상 수상. 2010년 제5회 불교문예작품상 수상. 2011년 제29회 인천시문화상 수상. 제13회 지훈문학상 수상. 2014년 제1회 형평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