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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애 시인 / 가벼운 산
태풍 나리가 지나간 뒤, 아름드리 굴참나무 등산로를 막고 누워 있다 오만상 찌푸리며 어두운 땅속을 누비던 뿌리 그만 하늘 향해 들려져 있다 이젠 좀 웃어 보라며 햇살이 셔터를 누른다. 어정쩡한 포즈로 쓰러져 있는 나무는 바쁘다. 지하 단칸방 개미며 굼벵이 어린 식구들 불러 모아 한 됫박씩 햇살 들려 이주를 시킨다. 서어나무, 당단풍나무, 노각나무 사이로 기울어진 채 한 잎 두 잎 진창으로 꿈을 박고 있는 굴참나무 제 뼈를 깎고 피를 말려 숲을 짓기 시작한다. 생살이 찢겨 있는 굴참나무, 그에게서는 고통의 향기가 난다. 살가죽의 요철이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착한 밥장수 할머니의 손등만 같다. 끝내 허리를 펴지 못하는 굴참나무가 세로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은 편견이다. 굴참나무가 쓰러진 것은 태풍 나리 때문이 아니다. 나무는 지금 저 스스로 살신성인하는 중이다, 하늘 가까이 뿌리를 심기 위해.
이선애 시인 / 주암호 억새
주암호 주변 돌면서 뼈 마디 앙상한 손들이 흔들리고 있다 호수가 생산한 저 흔들리는 유적들 그 하얀 손을 한 번 잡아보고 싶다. 수몰 지구에 숨어 있던 아이들이 몰려나와 내게 손을 흔드는 것일까. 돌무덤에서 부활의 순간까지 나는 잠시 눈을 감아본다. 한 번도 제대로 꽃 피워 본 적 없는 핏빛 봉오리 꽃솜의 삶을 생각하며 바람도 용서해 본다. 석양에 피를 묻히는 갈대, 오래 전 잃어버린 제 혈육의 뼈임을 인정해 본다. 잃어버린 것들은 언젠가는 돌아온다는 믿음을 머리 숙이고 가져본다. 주암호가 섬기는 내 어머니 하얀 머리도 푸른 심연을 흔들고 있다.
이선애 시인 / 식탁
나는 다리가 여럿이지만 한 발자국도 뗄 수 없다. 유리 가슴을 안고 방 안 한쪽 구석을 지킨다. 온 가족이 남긴 얼룩 모두 닦아내고 나면 가끔 허전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가족들이 꺼낸 말을 다시 듣는다. 언쟁 끝에 떨어뜨린 말의 모서리를 생각하며 가슴도 둥글게 호흡해 본다. 하루분의 생각도 둥글게 한다. 문득 막내 아이가 가슴에다. 노트를 꺼내놓고 도형을 그린다. 세모, 네모, 프랙털 도형 나는 이 도형들이 내 가슴을 어떻게 건널까 지켜본다. 녀석은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내 가슴에 남겨놓고 딴짓을 한다. 내게 난해하게 차려진 식탁 참 따뜻하다.
이선애 시인 / 공룡 발자국 옹달샘
갯바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수억 년 전에는 바위도 말랑말랑했나 보다. 공룡 발자국이 새겨진 자리 옹달샘이 살고 있다. 그러나 낯선 공룡 발자국 같은 옹달샘 하나가 핏빛이다. 잇자국 선명한 담배꽁초가 처박혀 푸르른 수심을 빨고 있다. 누가 이 깊은 섬 사도까지 찾아와 실직의 아픔을 태우다 간 걸까 제 발자국 만에서 공룡이 일어선다. 쓸쓸히 걸어 나간다. 바다 속으로 난 길과 산꼭대기 쪽으로 난 길을 걸어 사라진 공룡은 돌아오지 않는다. 세상의 발자국들은 먼 곳을 향한다. 깔깔거리며 아이들이 흩어진다. 또다시 만조를 기다리는 공룡 발자국, 푸르게 자정해야 할 핏빛 시간을 견디고 있다.
이선애 시인 / 김장하는 날
어머니는 전사다. 전화戰火가 휩쓸고 간 우물가, 바람에 나뒹굴고 있는, 무수한 잔해들을 본다. 텅 빈 소쿠리에 담겨 있는, 붉은 고무장갑, 널브러져 말라붙고 있는, 피 묻은 살점들......, 화생방전이 아니라 전면전이 벌어졌나 보다. 잠시 휴전이 선포된 걸까. 어머니의 매운 손끝, 축 늘어져 있는, 족히 백 명은 넘어 보이는, 패잔병들의 상처를, 붉은 약으로 싸매고 있다. 구설口舌의 화살촉에 맞은 내 가슴의 상처도 보았는지, 어머니는 깨고 물 묻힌 거즈로, 눈치껏 동여매어주고 있다. 전쟁戰爭은 잔인하다. 끝내 어머니도 깊은 내상을 입은 채, 마루 위에 쓰러져 눕는다. 쓰러져 누운 채, 필승을 잠꼬대한다. 간꽃 핀 전투복 사이, 찬바람이 보초를 서고 있다.
나도 이제는 전쟁을 즐긴다. 아파트 베란다가 오늘 온통 불바다다.
이선애 시인 / 죽림정사에서 만난 하현달
달까지의 거리가 사라지고 있네요. 손을 뻗으면 이내 만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리산 죽림정사에서 만난 하현달이 내게 은잔을 들고 와 소주를 건넨다.
내 마음도 단풍처럼 불이 붙어 두두둑 어딘가가 실밥이 터져버린다.
계곡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아침이면 내 마음도 찬 이슬 맞아 마당 가득 뒹굴고 있겠지?
이 무렵 여긴 별자릴 앞에 놓고 풀벌레들 논쟁이 시끄럽다.
밤이 깊을수록 텅 비어가는 내 안, 누군가가 심우도 한 장 그려 놓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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