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환 시인 / 문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2.

이환 시인 / 문

 

 

당신이 열고 내가 들어갈 때 문은 완성된다

당신의 벨소리에 내가 응답할 때 문은 문다워진다

빈집의 적막이거나 구부정한 독거의 등 앞에서

문은 할 말을 잃고 우는 소리를 낸다

편안한 아지트거나 어둡고 서늘한 그늘,

문은 그 입구이거나 출구다

밖을 닫는 순간 안이 열리고

안을 닫는 순간 밖이 열린다

저쪽과 이쪽의 경계에 서서

당신이 건너가고 건너오는 동안

기다리다 하루가 저문다

당신의 손목을 비트는 저

둥근 손잡이는 그러므로,

당신을 시작하고 마감한다

아침의 문은 활짝 열어젖혀야 하고

저녁의 문은 단단히 잠겨 있어야 한다

한 번 열고 나간 문이 돌아오지 않거나

한 번 닫힌 문이 계속 닫혀 있다면

말 못할 울음이 떠돌고 있다는 증거,

발 벗고 문을 찾아나서거나

문을 따고 들어가야 한다

친절한 손잡이가 필요하다

당신이 지금껏 건재하다면

문을 잘 운용한 자,

나는 늘 문 안쪽이거나 바깥이다

평생 문만 들락거린다

 

월간 웹진 『공정한시인의 사회』( 2019년 02월호)

 

 


 

 

이환 시인 / 사랑받아 피운 꽃 한 송이

 

 

너를 피우느라 이 한 몸 바쳤거늘

너는 어찌하여 나를 탓하느냐

내가 가진 양분을 모두 주었거늘

너는 왜 불평만 하느냐

 

너는 스스로가 별 볼일 없다 생각하고

그저 누군가 쉽게 꺾을 수 있는 꽃 한송이라 생각하지만,

이거 하나 잊지 말거라

너는 나의 전부이다

 

너에게 다 주고 나 이제 황혼을 맞이하지만

더 못해준 것 끝내 마음에 걸린다

 

나중에 네가 땅에 자리잡아 한 그루 나무 되면

너의 가지에 꽃 피울 그 날이 오면

이 내 마음을 알아주거라

 

 


 

 

이환 시인 / 면도기

 

 

밤마다 자라는 야성을

잘라내야 직성이 풀린다

어디로 튈지  

어떻게 휘두를지 모르고 날뛰는 들소

대적하던 네안데르탈인의 붉은 울음을

잠재워야 한다

 

향수를 바르고

꽃무늬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반듯한 걸음 또박또박 걸어가기 위해서는

너의 잘 버린 날이 필요하다

불쑥 뻗쳐나가는 숲과 동굴의 유산들을

숨죽이며 쓱쓱 잘라버려야 한다

 

세련된 도시의 품격 있는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세상과 발맞추기 위해서는

죽을 때까지 잘라내고 또 잘라내고

끝없이 목숨을 손질해야 한다

 

아침마다 제 얼굴 마주한 채

칼의 서약을 한 자들이 와르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환 시인 / 내통하다

 

 

내가 모르는 짐승 한 마리

내 안에 잠자고 있어

슬쩍 깨어날 때 있지

사랑도 뭣도 안 되고

술도 노래도 시들하고

온몸으로도 역부족일 때 그럴 때

바깥세상 아무 데고 확 질러버리고 싶지

잠자고 있던 짐승 한 마리 풀어놓고

세상을 막 조롱하고 싶지

배설에는 은밀한 기쁨이 있어

조금 드러내고 세상을 만나면

하늘과 내통하는 기분

살다가 문득

고향끼리 만나거나

한물간 군복들끼리 서로 마주칠 때

잠자고 있던 짐승들 달려 나와

맞장구치며 낄낄거리고 소란 떨고

괴이한 행동하기도 하지

빼꼼히 내밀고 있는 짐승의 주둥이를

저들끼리는 서로 알아보고 좋아서 날뛰는 거지

별도 보이지 않는 도시

밤하늘에 대고 시원하게

한바탕 질러버리지 그러면

수고했다고 등을 토닥이며

헝클어진 털 손질해주고는

안으로 다시 가만히 불러들이는 거지

 

 


 

 

이환 시인 / 파이를 반죽하는 시간

 

 

온종일 정지된 시간 속에 갇혀 있었어요 무료한 활자들만 사각의 허공을 날아다녔어요 숨이 막혀요 아직도 머릿속에 우글거리는 좀 벌레들, 이 전쟁은 언제 끝날까요? 이러다 깊은 바닷속에 수장되어 버리면 어쩌죠

 

얘야, 지금은 파이를 반죽하는 시간 빛나는 아침을 만들고 싶지 않니 이스트가 곧 부풀어 오를 거야 지루한 시간의 팔뚝이 네 손목 비틀고 심장을 압박해 오더라도 묵묵히 견뎌내야 한다 브라운관을 활보하는 믿음직한 어깨와 날렵한 하이힐 아침의 토픽을 장식하는 시원한 이마들을 보렴 아직 너는 이 바닥의 생리를 학습 중이란다

 

배가 고파요 엄마 누가 나를 다 파먹은 것 같아요 몸이 텅 비어 껍데기만 남았어요 이 몸을 다 채우려면 오늘 밤도 모자라겠어요 밤마다 검은 숲을 파헤치고 다니는 굶주린 늑대 한 마리, 허기가 몰려와요 늘어나는 살 퉁퉁 불고 팽창해져서 터져버릴지도 모르겠어요 이 쓸모를 모르는 비대해진 슬픔은 어떻게 분리수거하나요

 

 


 

이환 시인

경남 김해 출생. 2011년 《우리詩》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세상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갖기 시작했다』가 있음. 현재  시산맥 시회 특별회원, 〈영남시〉 동인. 현재, 부산 사하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