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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완희 시인 / 붉은 수숫대
붉은 수숫대가 서 있다 천만 원 이하 벌금이거나 2년 이하 징역의 경작 금지 팻말이 스러져 있는 둑방 길가 경작주는 잘 익은 놈들만 골라, 남몰래 모가지만 뎅강 잘라 갔다 온몸에 흘러내린 선명한 핏자국
이제 수숫대는 강남역 네거리 붉은 현수막 두른 철탑 위 붉은 조끼 입은 해고 노동자가 되어 차가운 바람 앞에 섰다
늦가을 찬 서리가 내리고 겨울지나 봄이 올 때까지 이파리 껍데기 모두 칼바람에 날리고 하얀 몸통만 남아 비틀린 세상에 맞서며
정완희 시인 / 거지주머니병
앵두나무가 병에 걸렸다 올봄엔 꽃이 많이 피어 앵두 풍년을 기대했는데 열매 대신 기다란 주머니들이 달렸다 심지어 주머니 속에는 아무것도 없고 나뭇가지도 시름시름 시들어간다 영양실조로 거지주머니병에 걸린 거란다
미안하구나 내가 너를 가지로 만들었구나 작년에 앵두를 많이 따고도 올해도 풍성한 열매만 기대했던 나까지 앵두 거지가 되는구나 거지 같은 병 얼씬도 못하게 내년엔 풍성한 퇴비를 발등에 덮어주마 세상 모든 일들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정완희 시인 / 부여에서 버스를 탄다
부여에서 행사 마치고 서천 가는 버스에 오른다 긴 속눈썹 초롱 거리는 눈을 가진 꽃처럼 향기로운 나이의 천사
흔들거리며 버스는 가을 속으로 달리고 들판이나 산 아래 집들은 어스름 속에서 굴뚝 연기를 피워 올리다가 하나둘 별빛으로 초롱 거리며 하늘을 향해 불빛들을 쏘아 올린다
옥산 다음 신안 정류장에 내려 녀의 마을 앞까지 바래다준다 내 딸의 나이인데 두근거림은 어쩌란 말인가 두 손을 흔들어 잘 가라 인사한다 어쩌면 저 하늘의 별처럼 먼 인연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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