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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와연 시인 / 다독이는 저녁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2.

정와연 시인 / 다독이는 저녁

 

 

집 나간 고양이가 돌아온

저녁을 다독인다

손바닥에 검은 때가 묻는다

그건 저녁 어스름을

한없이 돌아다녔던 흔적

 

종종 전봇대에 붙는 고양이들

밤이면 물살 같은 수염의 갸릉갸릉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흘러들었던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내 아이의 울음소리로 들리던 저녁

화들짝 나가 보니 내 발을 핥고 있다

 

먹고 자고를 며칠째 반복하더니

홀쭉한 배가 채워지고 제 모습을 찾아간다

 

나는 불을 켜지 않은 방으로

빈한하게 들이치는 어스름을 또 다독거린다

딸깍, 불을 켜면 집 근처를 서성이던 고양이들처럼

어스름은 후다닥 도망친다

가끔은 저녁이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스름을 묻히며 내려놓거나

포기하는 일을 고르는 저녁

 

돌아온 고양이 몸에

전에 보이지 않던 잿빛이 등을 타고 빠져나가고 있다

그것 다 안다 내 손으로 옮겨 온 것이라는 것을

잿빛 하늘에 별이 솟듯

저녁을 쓰담쓰담 다독이다 보면

손바닥에 별 뜨는 날 꼭 올 것이다

나를 다독이듯

고양이를 다독이는 저녁이다

 

정와연, 『네팔상회』, 천년의 시작, 2018,

 

 


 

 

정와연 시인 / 말(馬)

 

 

수선집 사내의 어깨에 말의 문신이 매어져 있다

길길이 날뛰던 방향 쪽으로 고삐를 묶어둔 듯

말 한 마리 매여 있다

팔뚝에 힘을 줄 때마다

아직도 말의 뒷발이 온몸을 뛰어다닌다

고삐를 풀고 나갈 곳을 찾고 있다는 듯 연신 땀을 흘린다

저 날리는 갈기를, 콧김을, 이빨 드러내는

투레질을 굵은 팔뚝에 가둬두고 있다는 것을

저 사내 알기나 할까

어쩌면 질풍노도의 시절에 스스로 마구간을 짓고

지독한 결심으로 고삐를 매어두었을지도 모른다

 

말은 복종하는 발굽과 항거하는 발굽이 다르다

앞발을 굽힐 때 뒷발은 더 빡세게 버티는 법이다

 

어느 뒷골목의 시간들을 붙잡아

사내의 안쪽을 향하게 단단히 묶었으나

꿈틀거리는 역마살이란 언제까지 갇혀있을 발굽이 아니다

비좁은 마방에서 수년째 구두를 깁는 일이

자못 수상하기까지 하다

닳고 닳은 뒤축을 깁는 일과

말의 박차를 박는 일에 우연(偶然)이 있다면 그것은 다 길의 파본이다

 

발급을 갈아 끼울 때마다 사내는

박차고 나가려는 팔뚝의 불뚝한 말을 오래 쓰다듬듯 주무른다

이제야 말 한 마리를 다룰 줄 안다는 듯

말과 주인이 따로 없다는 듯이

 

『네팔상회』 (천년의 시작 2018)

 

 


 

정와연 시인

1947년 전라남도 화순에서 출생. 숭의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13년 《영남일보》 문학상과 201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네팔상회>(천년의 시작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