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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성신 시인 / 반성하는 호박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2.

김성신 시인 / 반성하는 호박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

심장이 파인 다음

곰곰 고아지는 일에 대해

 

이웃들이 함께 테이블 앞에서 얽히면

쉽게 끓어오르지

빚, 이자, 독촉장이 큰 통에 고아질 때

오감을 오래전 땅에 묻었을지라도

밤은 이럴 때 자라나서 캄캄해졌지

 

바람이 주는 통증에 둔감했던 이파리며

결실을 독촉 받던 노란 꽃,

될 대로 되기만 바랐던 내가

수령, 납부, 당첨 같은 말들을 자꾸 되뇌다 보면

눈물 대신 앙다문 파리한 입술이 지워질까

 

눈꺼풀이 사라져버렸어

묵묵히 갚아내야 하는 것들 끼니로 채워주면

허물 벗듯 난 다시 물이 될까

툭툭 보글거리다 밀어 올리는 동그라미

 

구절양장 (九折羊腸)으로 한 시절 꺾이며 내려가다

물기에 젖어 혹은 썩어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기차소리를 발뒤축으로 밟는 일이다

 

식욕이 무덤이 되는 일에 대해서

울적해질 때

나는 남은 호박 줄기들을 모아 다시 햇빛 쪽으로 간다

꽃이 핀다 모르는 척

 

 


 

 

김성신 시인 / 표백漂白

 

 

기억나지 않아요,

눈앞에 팔랑거리는 나비를 잡겠다고

고무신을 아차,

허공으로 날려버렸어요

 

저기 좀 봐

슈퍼타이 대신 설탕을 넣었어요

나를 녹여서 빨려고 해

어제와 똑같은 스웨터를 입게 될지 몰라

 

집 나간 병아리를 찾겠다고 거품을 손으로 찌른다

애타는 목소리를 휘젓는다

온몸에 멍이 든다 하얗게 하얗게 나를 잊는 병

 

둥둥거리며 세탁기 속에 삶아져 쉼 없이 돌아가다

쫑긋 귀를 세우면, 점점 표정이 굳어지지요

 

꼬들꼬들 잘 마른 빨래처럼 보송보송 웃으며

당신의 밤을 샤프란 샤프란 하고 싶어요

 

손으로 찍는 자국마다

설탕은 또 눈이 되어 내리고 있어요

 

 


 

김성신 시인

전남 장흥 출생. 원광대 한문교육학과 졸업. 광주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2017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가 당선되어 등단. 2016년 생명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