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신 시인 / 반성하는 호박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 심장이 파인 다음 곰곰 고아지는 일에 대해
이웃들이 함께 테이블 앞에서 얽히면 쉽게 끓어오르지 빚, 이자, 독촉장이 큰 통에 고아질 때 오감을 오래전 땅에 묻었을지라도 밤은 이럴 때 자라나서 캄캄해졌지
바람이 주는 통증에 둔감했던 이파리며 결실을 독촉 받던 노란 꽃, 될 대로 되기만 바랐던 내가 수령, 납부, 당첨 같은 말들을 자꾸 되뇌다 보면 눈물 대신 앙다문 파리한 입술이 지워질까
눈꺼풀이 사라져버렸어 묵묵히 갚아내야 하는 것들 끼니로 채워주면 허물 벗듯 난 다시 물이 될까 툭툭 보글거리다 밀어 올리는 동그라미
구절양장 (九折羊腸)으로 한 시절 꺾이며 내려가다 물기에 젖어 혹은 썩어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기차소리를 발뒤축으로 밟는 일이다
식욕이 무덤이 되는 일에 대해서 울적해질 때 나는 남은 호박 줄기들을 모아 다시 햇빛 쪽으로 간다 꽃이 핀다 모르는 척
김성신 시인 / 표백漂白
기억나지 않아요, 눈앞에 팔랑거리는 나비를 잡겠다고 고무신을 아차, 허공으로 날려버렸어요
저기 좀 봐 슈퍼타이 대신 설탕을 넣었어요 나를 녹여서 빨려고 해 어제와 똑같은 스웨터를 입게 될지 몰라
집 나간 병아리를 찾겠다고 거품을 손으로 찌른다 애타는 목소리를 휘젓는다 온몸에 멍이 든다 하얗게 하얗게 나를 잊는 병
둥둥거리며 세탁기 속에 삶아져 쉼 없이 돌아가다 쫑긋 귀를 세우면, 점점 표정이 굳어지지요
꼬들꼬들 잘 마른 빨래처럼 보송보송 웃으며 당신의 밤을 샤프란 샤프란 하고 싶어요
손으로 찍는 자국마다 설탕은 또 눈이 되어 내리고 있어요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윤이 시인 / 아가씨들 (0) | 2022.05.12 |
|---|---|
| 육호수 시인 / 중보 외 1편 (0) | 2022.05.12 |
| 김제김영 시인 / 발신인 없는 소리들 외 1편 (0) | 2022.05.12 |
| 정와연 시인 / 다독이는 저녁 외 1편 (0) | 2022.05.12 |
| 정완희 시인 / 붉은 수숫대 외 2편 (0) | 2022.05.1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