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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호수 시인 / 중보
오늘에서 앓는 기도는 눈앞의 길을 아물게 하고
궁창으로 잠겨가는 예배당에 어떤 신의 촛대가 초 대신 녹아내려 매일 밤 나를 나로 지우는지
같은 하늘 점점 붉어지고 구름 깊어. 깊은지
오늘 나의 기도는 감은 당신의 눈꺼풀 아물게 하고
눈꺼풀; 어둠으로 꼼꼼히 칠한 창문들 표정 잊은 표정의 어둠
기도 속에 몸을 숨긴 귀신들과 구원으로 사라진 선지자와 진실을 견디는 미치광이에게 감은 눈을 깜빡여 초점을 맞춰본다
내가 꿈의 숙주라면 시간의 입장에서라면 철새들은 한 번도 계절을 떠난 적 없고 백야와 극야 사이를 오가는 천사들의 날개 끝을 조금씩 훔쳐내는 바람과 그러나
왜 지금 찬란인지 알 수 없는 빛 오늘 날개를 다한 나비에 비춰 꿈을 밝히고
빛 속에 시선을 던져두고 물고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구원은 빛 없는 밝음 뜻 없는 기도가 빛에 젖으면 초점을 내어두고 갈 수 없는 곳으로 간다
천한 자들의 천한 신에게로 죽은 자들의 죽은 신에게로
없는 자들의 없는 소리 시가 사라지면 보이는 시
월간 『문학사상』 2021년 10월호 발표
육호수 시인 / 잠들면 다신 자신으로 깨어나지 못하는
이레카 야자 말라가는 이파리 끝 조금씩 잘라내며 봄을 앞둔 겨울에서
겨울을 앞둔 봄 끝을 미루며 끝이 깊어진다
세상의 유일함을 믿으며 이 방의 귀신들이 남루해지듯 열대어의 푸른 지느러미 끝 조금씩 헤져 갈라진다
나는 몸무게만큼의 물주머니가 되어 이 어항의 물을 다 마셔도 저 화분의 갈증을 벗을 수 없을 것 같다
뿌리로부터 잎줄기 하나를 잘라낸다 이것은 손바닥
손바닥으로부터 잎줄기 하나를 잘라낸다 이것은 만료된 구원
푸른 행성의 푸름 속에 몸을 앞둔 몸 끝의 증거들
살을 긁다 보면 이건 내 살이 아닌 것 같다 내 살이 아니어야 할 것 같다
이제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는다 멸망한 세계에서 태어나 멸망하지 않는다
없는 고통을 위한 몸 없는 몸은 아니다
없는 사람을 위한 말 없는 말은 아니다
중력 없이 내려앉는 빛의 옹알이에 아직 눈 못 뜬 갓난 강아지에게 그랬듯 손끝을 물려본다
어디로도 나갈 수 없는 꿈은 어디에서 오니? 잠든 물고기 동공 속으로 사라진 초침은 어디에서 닳아가니?
잠시 나는 스스로의 무게로 무너지는 물주머니가 되어 모서리를 잃어가는 관엽식물의 목마름을 알 것 같아 홑날개가 타들어 가는 열대어의 목마름을 내 것 같아 그러나 나의 갈증이 될 수 없음이 나의 오랜 갈증
똑같은 일이 일어날 거야 바람개비만 보고 달리는 거야 눈 감으면 지는 거야
더 먼 갈증을 기다린다 더 먼 기다림을 기다린다 폐기된 세상에 태어나 폐기되지 않는다
피가 물이 되어 기억을 삼키고 기억은 몸이 되어 물을 만나는 오랜 가난이 방을 떠나지 않도록 보살핀다
계간 『시작』 2021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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