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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육호수 시인 / 중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2.

육호수 시인 / 중보

 

 

오늘에서 앓는 기도는

눈앞의 길을 아물게 하고

 

궁창으로 잠겨가는 예배당에

어떤 신의 촛대가 초 대신 녹아내려

매일 밤 나를 나로 지우는지

 

같은 하늘 점점 붉어지고

구름 깊어. 깊은지

 

오늘 나의 기도는

감은 당신의 눈꺼풀 아물게 하고

 

눈꺼풀; 어둠으로 꼼꼼히 칠한 창문들

표정 잊은 표정의 어둠

 

기도 속에 몸을 숨긴 귀신들과

구원으로 사라진 선지자와

진실을 견디는 미치광이에게

감은 눈을 깜빡여 초점을 맞춰본다

 

내가 꿈의 숙주라면

시간의 입장에서라면

철새들은 한 번도 계절을 떠난 적 없고

백야와 극야 사이를 오가는

천사들의 날개 끝을 조금씩 훔쳐내는 바람과

그러나

 

왜 지금 찬란인지 알 수 없는 빛

오늘 날개를 다한 나비에 비춰 꿈을 밝히고

 

빛 속에 시선을 던져두고

물고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구원은 빛 없는 밝음

뜻 없는 기도가 빛에 젖으면

초점을 내어두고

갈 수 없는 곳으로 간다

 

천한 자들의 천한 신에게로

죽은 자들의 죽은 신에게로

 

없는 자들의 없는 소리

시가 사라지면 보이는 시

 

월간 『문학사상』 2021년 10월호 발표

 

 


 

 

 

육호수 시인 / 잠들면 다신 자신으로 깨어나지 못하는

 

 

이레카 야자 말라가는

이파리 끝 조금씩 잘라내며

봄을 앞둔 겨울에서

 

겨울을 앞둔 봄

끝을 미루며

끝이 깊어진다

 

세상의 유일함을 믿으며

이 방의 귀신들이 남루해지듯

열대어의 푸른 지느러미 끝

조금씩 헤져 갈라진다

 

나는 몸무게만큼의 물주머니가 되어

이 어항의 물을 다 마셔도

저 화분의 갈증을 벗을 수 없을 것 같다

 

뿌리로부터 잎줄기 하나를 잘라낸다

이것은 손바닥

 

손바닥으로부터 잎줄기 하나를 잘라낸다

이것은 만료된 구원

 

푸른 행성의 푸름 속에

몸을 앞둔 몸

끝의 증거들

 

살을 긁다 보면

이건 내 살이 아닌 것 같다

내 살이 아니어야 할 것 같다

 

이제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는다

멸망한 세계에서 태어나 멸망하지 않는다

 

없는 고통을 위한 몸

없는 몸은 아니다

 

없는 사람을 위한 말

없는 말은 아니다

 

중력 없이 내려앉는 빛의 옹알이에

아직 눈 못 뜬 갓난 강아지에게 그랬듯

손끝을 물려본다

 

어디로도 나갈 수 없는 꿈은 어디에서 오니?

잠든 물고기 동공 속으로 사라진 초침은 어디에서 닳아가니?

 

잠시 나는 스스로의 무게로 무너지는 물주머니가 되어

모서리를 잃어가는 관엽식물의 목마름을 알 것 같아

홑날개가 타들어 가는 열대어의 목마름을 내 것 같아

그러나 나의 갈증이 될 수 없음이 나의 오랜 갈증

 

똑같은 일이 일어날 거야

바람개비만 보고 달리는 거야

눈 감으면 지는 거야

 

더 먼 갈증을 기다린다

더 먼 기다림을 기다린다

폐기된 세상에 태어나 폐기되지 않는다

 

피가 물이 되어 기억을 삼키고

기억은 몸이 되어 물을 만나는

오랜 가난이

방을 떠나지 않도록 보살핀다

 

계간 『시작』 2021년 가을호 발표

 

 


 

육호수 시인

1991년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재학. 2016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