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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성임 시인 / 단청하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2.

이성임 시인 / 단청하늘

 

 

가장 오래된 우물

부챗살로 피어난 햇빛이 금비늘을 만든다

퇴적층처럼 쌓인 우물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단청의 세계가 들어있다

출렁, 꽃두레박이 오르내릴 때마다

황금물고기들이 층층 구름 위로 몰려다닌다

별들이 드나들고

박하 향의 바람과 나비가 날아든다

하늘엔 얼마나 큰 손이 있어

지상의 모든 꽃밭에 단청을 치는가

종루를 떠난 홑씨하나

청동 거울을 밀고 누대를 쌓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장대 하나 흔들어대면

회전목마를 타던 내 유년의 단청무늬가

오색무지개 빛으로 번져나간다

안으로 안으로

나를 가꾸는 손길 앞에

한 알의 꽃씨로 순응하는 신생의 아침

우수수 쏟아지는 어린 목숨들

오늘은 꽃씨를 받아야겠다

바람과 구름과 태양의 비밀을 잉태한

작은 생명들을 주워 담아야겠다

 

 


 

 

이성임 시인 / 별을 굽는 여자

 

 

저리도 쉽게 별을 구워낼 수 있다니

세상, 연고라고는 엉덩이 붙여놓은 자리뿐인 여자가

오글오글 모여 있는 햇살 끌어안고

온 종일 별을 찍어내고 있다

설탕 한 스푼, 소다 찔끔 섞어 잘 저으면

양은 국자 안에서 흠실흠실 몸을 바꾸는 여자의 꿈

동네 아이들을 불러모은다

코딱지만한 손에 별 하나씩 쥐고

쪼그리고 앉아 꿈을 빚는 꼬마 녀석들

바늘 끝에 침을 살살 발라 계곡을 따라가면

알퐁스 도테의 별 하늘이 열리고

은하철도999가 열리고

붓끝에 매달린 고향 별 하늘이 열린다

바이올린 현처럼 쏟아지는 미리내 다리 건너

살풋 다가앉아 별을 다듬는 사이

어느새 초롱초롱 빛나는 개밥바라기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어둠 결을 저으며 고개를 들어보니

여자는 어느새 자리를 옮겨

하늘정원에 별자리를 굽고 있다.

 

 


 

 

이성임 시인 / 빈집, 별자리로 내 걸리다

 

 

누런 밀짚을 뽑아 짓는 집, 대들보를 세우고 서까래를 올린다. 구멍을 뚫어 두 기둥을 엇갈리게 엮는다 동서남북 중심을 잡아 수평으로 지붕을 올리는 집.

 

밤마다 열리는 음악회, 주연은 초록연미복 신사, 음악이 흐르는 계단을 따라 무대 중앙에 등장한 여치악사, 찌르 찌르르 찌찌르르, 무성한 별빛이 운다

 

나선형 밀짚 계단

통로를 따라 발밤발밤 오르면

길은 곳곳 돌아가고

한 여름 밤 정원에 매달린

내 영혼의 빈집

찌르 찌르르 찌찌르르

 

 


 

이성임 시인

1961년 전남 장성에서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창과. 2009년 계간 《시안》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