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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용훈 시인 / 저물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1.

최용훈 시인 / 저물녘

 

 

남반구를 떠난 눈보라가 북위 32도를 지나 북상 중인 계절에

가로수들을 장식하는 3촉짜리 빗방울들

 

저 빗방울들이 출발지에서 꾸물대지 않았다면

막연한 기다림도 질척대지 않았을 테지

 

어스름의 촉수(燭數) 낮은 분별이 범람을 해

식어버린 한숨이 입김으로 연소한다.

 

땅거미와 접속하면 굳기름처럼 식어서 불투명해지는 것들

 

이슬과 수액만 먹고 얼마나 버틸 수 있겠냐고

지난여름 짝짓기를 못 한 매미가

가로수 허리춤에 매달려 염통 쥐어짜며 울 때

 

끝자락이 동그랗게 말리는 울음은

얼마나 다급한 것인가!

 

잦아들어야 촉수를 거두는 빗줄기들

 

가까이하려고만 하면 멀어지는 것들이 있다고

저문다는 생각과 잦아든다는 느낌이 서로 어깨를 겯는다

 

어둠 속을 들여다보려면 어둠에 익숙해져야 해

멀어져가는 의욕이 식어가는 생기(生氣)를 부축하고 비치적대면

 

어느새 가까워져 친숙해지는 간절함은

하늘 아래 첫 동네 거주민답게 계절을 앞서 살고

 

저물녘에 도착해서야 숭고해지는 것들.........

 

어둠이 눈에 익자

쓸쓸함과 의기투합하면 절박해지는 자문자답이

개밥바라기가 샛별로 뜬 서녘 하늘을 응시한다.

 

 


 

 

최용훈 시인 / 고향

 

 

살다 보니 종종

왜 어머니 뱃속에서 부터

사람 꼴이 제대로 된 뒤에야

머릴 땅 쪽으로 둔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한국시인협회 刊 『 패랭이꽃의 안부를 묻다 』 에서

 

 


 

 

최용훈 시인 / 절망을 혁명하고 싶소

 

 

삶은 날품을 파오, 죽음의 피고용인이요.

별별 일들을 다 하고 일당으로 잠을 지불받소

잠을 아껴가며 일했소만 체불되는 날이 많았소

두 달 넘게 품삯 밀렸을 때가 있었소

파산지경에 이른 삶이, 알약을 먹고 잠을 횡령했다가

죽음에게 불려가 해고될 뻔했소

지금도 벌충을 하느라 잠을 자면서도 일을 하는 꿈을 꾸오

죽음이 부르주아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았소

해고되기 전에 자진 사표를 쓰는 삶이

이 나라에서만 하루 서른다섯 명쯤 된다고 하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이 벅차 아버지는 의식을 팔아버렸소

소문을 듣고 방문판매 온 목회자가

죽음의 우월성을 가족들에게 설명했소

계약서에 도장 찍듯 기도말미에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아멘이라고 언약을 했소

내 최대의 불효는 잠을 가져가지 않으려고

뜨고 가신 아버지 눈을 감겨드린 것이오

나는 죽음에 굴복해 종교를 갖고 싶지는 않소

이념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란 없소

천국도 사랑이란 굳건한 이념이 있소

살아서는 대면할 수 없는 권력자가 통치를 하오

일인독재요

평등의 기치아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오

치성과 기도로 사후세계의 기득권층이 되려는 사람들은

그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오.

죽을 때 빈손으로 간다는 말을 거짓말이오

주검은 자기 몸에 축적한 잠을 가지고 가오

죽음은 공평해 보이지만, 주검은

살아 생전 각 자의 실천궁행의 모습으로

마지막 형상을 이루고 있소

 

영생은, 잠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소

 

 


 

최용훈 시인

1955년 서울에서 출생. 2008년 《애지》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소리의 원근법』(지혜, 2015)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