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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정일 시인 /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4.

장정일 시인 /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철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선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들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장정일 시인 / Job 뉴스

 

 

봄날,

나무벤치 위에 우두커니 앉아

<Job 뉴스>를 본다.

 

왜 푸른 하늘 흰 구름을 보며 휘파람 부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호수의 비단잉어에게 도시락을 덜어 주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소풍 온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듣고 놀라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비둘기떼의 종종걸음을 가만히 따라가 보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나뭇잎 사이로 저며드는 햇빛에 눈을 상하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나무벤치에 길게 다리 뻗고 누워 수염을 기르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이런 것들이 40억 인류의 Job이 될 수는 없을까?

 

 


 

장정일 시인 (소설가)

1962년 경북 달성에서 출생. 성서중학교를 졸업.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3집에 〈강정간다〉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실내극〉 당선. 같은 해인 1987년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최연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 1990년 『아담이 눈뜰 때』를 내면서 소설가로 전업. 대표작으로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길안에서의 택시잡기』. 1997 웹진 산티 기획위원. 2006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