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육 시인 / 가을의 비망록
최후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이다 서늘한 눈매로 서 있는 가을 나무는
지는 해 저녁놀 곱게 물들이듯 떠나는 모습이 아름답고 싶은 것이다
한때 뜨겁게 사랑하지 않은 자 어디 있겠고
마침내 결별이 아프지 않은 자 어디 있겠는가 노랗게 혹은 발갛게 울음의 색깔을 고르며 불꽃처럼 마지막을 타오르고 있다
빛나는 한때를 간직한 가을 나무는 알고 있다
하나 둘 떨구는 이파리마다 그리운 이름들을 호명하며
막막한 절망을 지워 가는 법을 그 간절함의 빛깔로
눈 감아도 선연히 되살아 오는 얼굴들 가슴 깊숙이 나이테로 새겨 두는 법을
김인육 시인 / 사랑의 물리학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제11회 미네르마문학상 수상작 김인육 시인 / 나를 울게 하소서 - 어머니의 세족
발이 운다 울음은 어디에서 정령처럼 깃들어 있지만 발이 울면 온 몸이 따라 운다 온 몸 구멍에서 붉은 눈물 쏟는다
모두를 위로 밀어 올리느라 늘 밑바닥만을 전전했던 맨발 그래서 발의 눈물에는 고단한 흙 냄새가 난다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거품 냄새가 난다
최후의 만찬이 있기 전 한 거룩한 사내는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었다는데
그녀의 발이 벌벌 우는 밤 오늘은 죄 많은 내가 거룩한 그녀의 발을 씻어준다
나를 밀어 올리느라 평생 맨발이었던 여인을 안고 돌아온 탕아가 눈물의 세족식을 한다 애달팠던 그녀의 최후를 씻는다
발을 씻어주는 것은 진정한 섬김이요 사랑의 표징일지니 눈물 다하도록, 내 죄를 세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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