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순금 시인 / 아, 21그램
사람의 영혼을 무게 재어 보았더니 21그램이라고 한다
그 동전 너댓 개 정도의 무게에 내 한 생이 끌려 다녔다니!
그 가벼운 힘이 휘두른 사랑의 칼날에 피 흘리며 죽음의 문턱에 쓰러졌던가,
저울의 눈금이 출렁, 기울어지는 몸의 2천분의 1도 안 되는 무게가 두근거리며 사랑한 비밀한 몸의 정수리에 떡하니 앉아 뜨거운 피 오르내린 골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니
영혼에 경배하고 높은 곳으로만 끌고 다녔던, 수백 톤의 고통을 끌어내 시를 쓰게 한, 아, 21그램!
거대한 힘이 하늘에서 한 생애 잡고 있는 줄만 알았던,
아니다 21그램에 힘을 주신 그 거대한 힘
을, 언제 깨우칠까!
장순금 시인 / 그늘 이불
저녁이 쓰고 남은 손바닥 만 한 온기에 그늘이 집을 지었다 한 번도 홀로 햇빛 속에 서 보지 못한 담벼락과 골목과 구석이 함축된 더듬더듬 어눌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막다른 길 앞에 납작 엎드린
한 번도 젖어보지 못한 속내 안까지 샅샅이 비춘 햇살의 낯 뜨거운 흰 뼈들이 백야의 긴 밤을 오가도 등 뒤의 새벽은 보지 못해 지평은 밤을 나와 달빛 속 외딴방을 지나 홀로 노숙하는 저녁에 몸을 기댔다
지상에 지분 없는 남루한 발들이 평화 한 평 그늘로 들어가 이불을 덮을 때
뜬구름을 덮고 자던 허공이 온기로 데워진 그늘을 한 겹씩 끌어당겨 제 발등을 덮고 있었다
장순금 시인 / 아브라함 병원
황금색 고딕체 간판이 우뚝 선 아브라함 병원 불임 노산 전문 병원이 상가에 들어섰다 주치의 손을 거치면 예순에도 생산 포기한 아기집에 별이 뜬다고 전단지 광고에 입소문이 자자하다 죽음 같은 깜깜 동굴에 빛의 통로가 폭포처럼 뚫려 쌍둥이도 세쌍둥이도 만들어낸다는 신의 손을 가진 아브라함 원장님 그는 매일 제물 이사악의 목을 베려던 칼에 기도를 한다 목숨 주신 신의 칼을 마이더스의 손으로 쥐어 주시어 아브라함 원장의 손끝에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닌 불임 여성들을 모이게 하시면 아브라함이여, 천둥 같은 최 상질의 기를 모아 기도 올리겠으니 황금색 간판이 무색하지 않게 식탁에도 황금 수저를 놓게 하소서 그럼 제물로 뉴질랜드의 가장 살찐 양을 급송 올리고 아브라함 이름의 로얄티도 넉넉히 헌금 하겠사옵니다 아브라함이여,
장순금 시인 / 지나가는 동안
한 사람이 몸속을 지나가는 동안 몸 밖은 백년이 흘렀어
시작은 책 속에 끝을 숨기고 문장으로 나를 눌러 놓았어 심야를 달리는 트럭의 깜깜 속도 속에 우리를 숨겼어 생략된 세상에서 도벽처럼 가지에 앉아 떠는 동안 바람 사이로 피로 물든 잎들을 낳았어 한 알도 부화되지 못한 잎들은 스스로 숨을 끊어 죽은 기억 속으로 들어갔어
우리는 아무도 새가 되지 못했어
죽은 기억이 죽음 같은 고요에 발이 빠져 비릿한 향내를 봄의 무덤에 뿌리고 책 속에 숨은 무수한 벽이 서로 눈물을 닦아주며 죽은 잎들을 펄럭이고 있었어 나는 천천히 물처럼 흘러내리고 한 사람이 지나가는 동안 몸 밖은 보이지 않았어
장순금 시인 / 얼마나 많은 물이 순정한 시간을 살까
할머니는 샤워기로 몸을 수십 번 헹구고 또 헹궈냈다 몸뚱아리에서 먼지와 오물이 쉴 새 없이 묻어나오는지 두 시간째 샤워기 앞이다
땡볕에 무방비로 삐져나온 살 속으로 먼지바람 욕설 눈총도 박혔는지, 악취도 몸속을 뚫고 들어왔는지 유효기간이 끝난 버려진 시간들이 할머니 발바닥에 달라붙어 세척을 강요했다
할머니는 몸 바꾸고 싶었을까, 물로 수백 번 씻어내면 내일이면 새로운 생이 시작될지 몰라 바뀔지 몰라 보송한 햇살이 몸 덥히는 따끈따끈한 생이 아침 밥상에 오를지도,
날마다 내일은 향긋한 몸으로 햇살을 주워야지 깨끗한 신발로 순정한 시간을 주워야지 갓 나온 싹을 주워 서쪽에 버려진 봄을 사야지
한 번쯤은 비탈진 척추를 볕에 세우고 고른 길 파랗게 오르고 싶은,
길바닥에 갇힌 할머니는 등껍질에 수백 번 물을 끼얹으며 오물 묻은 허공을 씻고 또 씻고
장순금 시인 / 나무가 나뭇잎에게
뼈와 살 사이의 숨은 간극은 어디까지일까
나와 작별 한 나는 몸에 돋은 세상의 잎을 다 버렸다 솜털 사이로 흘린 눈물 한 점도 닫아 매달린 건 하늘에 걸린 고립과 고립에 매달린 가지만 햇빛을 돌아앉은 개망초에 기대 울었다
햇빛 한 오라기 가까스로 체온을 붙든 겨울에 뼈 한 가닥으로 서 있는 나는 살아있음이 뼈 한 가닥 이었다
나뭇잎과 나무 사이에서 자란 푸른 구멍이 오래된 슬픔처럼 익어가 익어서 틈과 결에 꽃이 피기를 바람은 만발해줄까
밤새 나뭇잎은 몸에 남은 일조량을 다 내려 젖은 흙으로 발을 닦고
두꺼운 벽을 데워줄 장작이 되려고 물기 다 뺀 나무는 빛살 든 쪽으로 돌아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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