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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재경 시인 / 남해금산에 들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27.

배재경 시인 / 남해금산에 들다

 

 

그녀의 성화에 밤나들이 길에 서다

 

겨울 공기는 남방한계선을 너머

북방한계선을 강, 타, 한, 다, 고,

두터운 외투에 안긴 여자가

벽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오다 휘발된다

 

겨울은 몰이꾼처럼 지상에 어둠을 풀어놓고

그 어둠을 가르며 고속도로는 성난 카오스의 비명으로 가득하다

아프리카 치이타처럼 날렵한 저 질주 본능들

한번만 걸려들면 하이에나처럼 남김없이 먹어치울 기세다

 

무거움과 가벼움의 이중경계를 가득 품은

내 머리는 지끈지끈,

그녀는 쉼 없이 붉은 입술을 여닫는다

 

그녀 입술의 광포함을 달래려 찾아든 남해금산!

 

가르마처럼 터놓은 보리암 가는 길

웅크린 짐승들이 산자락에 숨어 날카롭게 노려본다

어둠은 언제나 희망과 공포의 칼부림이 난무한다

깜깜한 밤하늘에 촘촘히 사금파리들이 반짝이고

반딧불처럼 번쩍이다 조으는 별들의 군무가 심장을 잡아당긴다

 

마침내, 마침내,

그녀의 입술이 짧은 비음을 토하다 숨을 거두었다

 

 


 

 

배재경 시인 / 대상포진

 

 

약속 없이 떠난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꽃이 피거나 말거나

눈이 내리거나 말거나

 

그녀는 돌아올 생각이 없는갑다

 

벚꽃들이

봉두난발 풀어헤친 옷섶으로

빠알간 속살들을 내보이며 유혹을 해대고

구절초 하늘하늘 눈시울만 태운다

 

온종일 나는

우중충 빗물만

빗물만

사나흘 굶은 듯 들이킨다

 

마침내 꽃잎 하나 피웠다

 

 


 

배재경 시인

1966년 경북 경주에서 출생. 1994년 《문학지평》으로 작품 활동. 시집 『그는 그 방에서 천년을 살았다』 등이 있음. 현재 계간 『사이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