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라 시인 / 뫼비우스의 띠
어머니를 낳을 수 없어서 딸을 낳았습니다 어머니가 되고 싶어서 딸을 낳았습니다
아침마다 머리를 빗겨주시는 떡갈나무 그늘을 옮겨다 주시는
어머니와 어머니 사이에서 나는 고아처럼 서럽습니다
딸을 낳으려다 나를 낳고 말았습니다 나한테 미안해서 울 뻔했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히 비겁합니다
박미라 시인 / 도플갱어
45억 년 넘게 그렇게 계시다니! 무엇을 견주어 달을 말하겠는가 그러나 온갖 원망과 간절을 받아 안는 달빛 너머에는 터지고 패인 분화구 가득하다니
그렇다면 여기도 천지사방에 달이다.
봐라, 달! 저기 또 저기 달이 지나가신다 뛰어가신다 맨발의 달이 절름절름 가신다 마른 정강이를 내보이며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달이 지나가신다 터진 치맛단을 추스르며 달린다 둥둥 떠 가신다 저기 유채밭에 달 떴다 광화문 네거리에 달 떴다 서귀포 앞바다에 달 떴다 방안에 부엌에 백화점에 달 떴다
어떤 달은 그믐도 아닌데 가슴 푹 파이고 어떤 달은 벙싯벙싯 혼자서 만월이다 견디다 견디다 해를 집어먹는 달도 있지만 뱃속에 만경창파를 들여앉힌 저 달은 도대체 뜨거운 게 없다
분화구라는 말에서 맨 처음 달을 떠올린다면 달그림자를 본 적 없는 청맹과니이다 돌아앉아 하염없는 어머니를 못 보고 지나친 멍텅구리이다
간간이 가랑비 흩뿌려 먼지를 재우고 수시로 생겨나는 분화구를 귀신같이 감출 줄 아는 저이가 달이다
만약 내가 거기 있다면, 45억 년쯤 하룻밤에 달려가실 수 있는 저 달 오늘은 있는 듯 없는 듯 낮달로 떠있다
세상이 환한 까닭 중에 으뜸이다.
박미라 시인 / 모란 서사
부디,라고 적으면 바람 냄새가 나요
횃댓보에 심어둔 모란 아래 열두 살 단발머리가 나풀거려요 꽃들이 놀랄까봐 깨금발로 걸어요
이제, 나의 꽃들은 아득하고 아득한데
오늘은 부득부득 모란이 올라와요 억지로 열어본 폐가 안쪽에서 저 혼자 붉은 모란이 무너진 담장을 견디는 중인데요 눈부신 것들은 왜 눈물겨울까요
다시는 아무것도 서두르지 마세요
그래요 모란이 있었지요 없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지독한 것들을 깨문 혓바닥이 뚝뚝 떨구던 것은 심장에서 꺼낸 무엇인 듯해서
새빨간 거짓말까지도 그리워 하기로했지요
마음을 에돌아 온 바람 한 점이 문득 이름을 묻는데 눈에 든 꽃잎을 모두 거두어 당신쪽으로 밀어두는 아직은 봄날
꽃이었거나 꽃 같던 이여
부디, 이 서사를 새겨 읽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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