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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순해 시인 / 아득함에 대하여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

권순해 시인 / 아득함에 대하여

 

 

식탁 위 식은 커피와

먹다 남은 도넛의 오른쪽과

넘기다 만 문장이

 

내가 읽은 너의 마지막 문장

 

혈관 속으로

밀려왔다 부서지고

밀려왔다 사라지고

또 밀려오는

 

봉은사 영각전 툇마루에 앉아

또닥또닥 떨어지는 빗방울 지키며

식은 커피와

도넛 조각과 영각전의

 

아득한 거리를 가늠해 본다

 

 


 

 

권순해 시인 / 너를 기억하는 방식

 

 

블라우스 한쪽 소매가

옷장 속에 구겨져 있다

 

누군가 다녀간 깊은 흔적

 

미세하게 떨리던 최초의 순간을

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안으로 걸었던 겹겹 빗장처럼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방향을 알 수 없는 가물가물한 기억

더듬더듬 거슬러 올라가

손에 땀이 배도록 움켜쥐었던

은밀한 꽃의 계절

천천히 다림질한다

 

 


 

 

권순해 시인 / 간이역

 

 

오래된 책의 행간에서

툭 떨어지는 사진 한 장

 

누군가를 떠나보낸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를 떠나온 것 같기도 한 거리를

반짝이는 철로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본다

 

안녕 하고 짧게 손을 흔드는 사이

기차는 시간 저편으로 사라지고

단단하게 허공을 붙잡고 있는 젖은 눈

 

풍경을 하나씩 들여다보지만

쓸쓸함만 자라날 뿐

기억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뜨거운 아픔으로 금이 간 다기처럼

나는 여전히 간이역을 배경으로 앉아 있다

 

 


 

 

권순해 시인 / 철다리 홍어집

 

 

혼밥 혼술이 대세라지만

절대 혼자서는 못 가는 집이 있네

 

돼지고기 수육과 홍어 살점

삭히고 삶은 저 기막힌 궁합 앞에 코끝이 찡하네

 

찡하다는 건 흩어진 이름들을

노래 후렴처럼 하나하나 끼워 맞추는 것이네

 

덜커덩 시간이 되돌이표로 돌아올 때마다

점점 휘어지는 등과

취기처럼 무거워지는 발자국

 

삭힌 구린내 구겨 신고

낯선 이들과 둥글게 서로를 껴안는 저녘

 

혼자서는 절대 못 가는

철다리 홍어집은 철다리 밑에 있네

 

 


 

 

권순해 시인 / 고개를 끄덕이다

 

 

파도는

먼 곳에서 돌아와

제 안의 것들 모래 위에

오롯이 부려 놓는다

나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권순해 시인

1957년 대구에서 출생. 2017년 《포엠포엠》으로 등단. 시집 <가만히 먼저 젖는 오후>. 2018년 강원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시치미〉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