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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미라 시인 / 뫼비우스의 띠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

박미라 시인 / 뫼비우스의 띠

 

 

어머니를 낳을 수 없어서 딸을 낳았습니다

어머니가 되고 싶어서 딸을 낳았습니다

 

아침마다 머리를 빗겨주시는

떡갈나무 그늘을 옮겨다 주시는

 

어머니와 어머니 사이에서 나는

고아처럼 서럽습니다

 

딸을 낳으려다 나를 낳고 말았습니다

나한테 미안해서 울 뻔했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히 비겁합니다

 

 


 

 

박미라 시인 / 도플갱어

 

 

45억 년 넘게 그렇게 계시다니! 무엇을 견주어 달을 말하겠는가 그러나 온갖 원망과 간절을 받아 안는 달빛 너머에는 터지고 패인 분화구 가득하다니

 

그렇다면 여기도 천지사방에 달이다.

 

봐라, 달! 저기 또 저기 달이 지나가신다 뛰어가신다 맨발의 달이 절름절름 가신다 마른 정강이를 내보이며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달이 지나가신다 터진 치맛단을 추스르며 달린다 둥둥 떠 가신다 저기 유채밭에 달 떴다 광화문 네거리에 달 떴다 서귀포 앞바다에 달 떴다 방안에 부엌에 백화점에 달 떴다

 

어떤 달은 그믐도 아닌데 가슴 푹 파이고 어떤 달은 벙싯벙싯 혼자서 만월이다 견디다 견디다 해를 집어먹는 달도 있지만 뱃속에 만경창파를 들여앉힌 저 달은 도대체 뜨거운 게 없다

 

분화구라는 말에서 맨 처음 달을 떠올린다면 달그림자를 본 적 없는 청맹과니이다 돌아앉아 하염없는 어머니를 못 보고 지나친 멍텅구리이다

 

간간이 가랑비 흩뿌려 먼지를 재우고 수시로 생겨나는 분화구를 귀신같이 감출 줄 아는 저이가 달이다

 

만약 내가 거기 있다면, 45억 년쯤 하룻밤에 달려가실 수 있는 저 달 오늘은 있는 듯 없는 듯 낮달로 떠있다

 

세상이 환한 까닭 중에 으뜸이다.

 

 


 

 

박미라 시인 / 모란 서사

 

 

부디,라고 적으면 바람 냄새가 나요

 

횃댓보에 심어둔 모란 아래 열두 살 단발머리가 나풀거려요

꽃들이 놀랄까봐 깨금발로 걸어요

 

이제, 나의 꽃들은 아득하고 아득한데

 

오늘은 부득부득 모란이 올라와요

억지로 열어본 폐가 안쪽에서 저 혼자 붉은 모란이

무너진 담장을 견디는 중인데요

눈부신 것들은 왜 눈물겨울까요

 

다시는 아무것도 서두르지 마세요

 

그래요 모란이 있었지요

없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지독한 것들을 깨문 혓바닥이

뚝뚝 떨구던 것은

심장에서 꺼낸 무엇인 듯해서

 

새빨간 거짓말까지도 그리워 하기로했지요

 

마음을 에돌아 온 바람 한 점이 문득

이름을 묻는데

눈에 든 꽃잎을 모두 거두어 당신쪽으로 밀어두는

아직은 봄날

 

꽃이었거나 꽃 같던 이여

 

부디, 이 서사를 새겨 읽으시기를

 

 


 

박미라 시인

199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서 있는 바람을 만나고 싶다』,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 『안개부족』, 『우리 집에 왜 왔니?』와 수필집으로 『그리운 것은 곁에 있다』가 있음. 르코문학창작기금(2020년) 충남문화재단창작지원금.(2016년.2019년) 세종우수도서선정(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