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길 시인 / 삼류 시인
남자에게 끌려간 아이가 사타구니가 만신창이로 찢어진 여자아이가 생피를 쏟으며 죽어가고 있는데
운문 형식 산문 형식 따지며 저 여자아이에 관한 시를 써도 괜찮을까
가난한 비정규직 청년이 안전장치도 없는 컨베이어 벨트에 몸이 끼어 몸이 동강 나 죽었는데
원관념 보조관념 따지며 저 청년에 관한 시를 써도 괜찮을까
쇠창살에 갇힌 닭들이 손톱 발톱 부리를 빼앗긴 수많은 닭들이 밤도 낮도 없이 알을 빼다 살처분되었는데
은유법 환유법 따지며 저 닭들에 관한 시를 써도 괜찮을까
늙고 병든 사람이 자식들에게 폐 될까 봐 말없이 앓다 구더기 밥이 되었는데
비장미 숭고미 따지며 저 구더기 밥에 관한 시를 써도 괜찮을까
행 구분 연 구분 운율까지 딱딱 들어맞는 이런 시를 써도 정말 괜찮을까
조은길 시인 / 나는 가끔 남동생을 오빠라 부른다
아직까지도 꼬박꼬박 생활비를 벌어다 주는 남편이 있긴 하지만
남편보다 훨씬 더 젊고 돈도 더 잘 벌고 사회적 직위도 높은 남동생이 자기 부부 여행 갈 때 우리 부부를 끼워주거나 눈이 휘둥그레지는 멋진 풍경을 보여 주거나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맛난 음식을 사주면
오빠야 고맙데이 콧소리를 한다
그러면 남동생은 믿음직한 능력자 우리의 오빠야로 변신하여 인터넷으로 섭렵한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우리 부부가 잘 알아듣게 차근차근 설명도 해주고 멋진 풍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어주고 지역 특산물도 챙겨서 사주고 돌아올 땐 우리 집 앞까지 정확히 태워다 준다
그러면 나는 오빠야 오늘 진짜로 고맙데이 꾸벅 절이라도 하고 싶은데
남편이 까칠한 표정으로 처남 오늘 수고 많았네 다음에는 내가 살게 나의 믿음직한 능력자 오빠야를 단숨에 손아래 남동생으로 돌려보내 버린다
그러면 남동생 부부는 우리 부부에게 꾸벅꾸벅 목뼈를 꺾는다
- 시집 『입으로 쓰는 서정시』(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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