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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은상 시인 / 환유(換喩)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

김은상 시인 / 환유(換喩)

 

 

  꿈 밖의 나무들 환해지는 봄날입니다.

 

  나는 오늘도 죽지 못해서

  울울창창 흘러오는 숲을 뒤척입니다.

 

  아직은 놓지 못한 체온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했던 또

 

  용서하지 못했던 한밤의 발자국들,

  내 몸속으로 음각한 우물입니다.

 

  어제는 꿈속에서 자살한 소녀를 만났습니다.

  어릴 적 모습 그대로 하얗게 흔들렸습니다.

 

  너무나 반갑고 그리웠던 이름을, 나는

  왕관앵무새라 부르고 말았습니다.

 

  소녀가, 소녀가 웃고 있었습니다

  왕관앵무새가, 왕관앵무새가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훨, 훨, 날아가 버렸습니다.

  멀리 무지개 속에서 들려오던 시냇물소리,

 

  웃으면서 깬 아침이 축축한 꿈결이어서

  오늘은 인연을 환유라 칭하겠습니다.

 

  실어증을 앓는 우울들이

  골목 여기저기로 떠내려갑니다.

 

  내가 흘러가는 것인지 길이 흘러오는 것인지,

  당신을 꿈이라고 다짐하면 한결,

 

  깊은 잠에 들 수 있는 아침입니다.

  내일의 앵무새가 애인의 태몽을 발설합니다.

 

  원관념의 원관념은 보조관념들이 합창하는

  주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신(神)이 잃어버린 공이 한밤을 향해 굴러갑니다.

 

  나는 매일매일 발음되는

  이 세계의 비문(非文)입니다.

 

 


 

 

김은상 시인 / 트락타트

 

 

 새의 동공 속으로 창공이 휘말린다. 난생卵生과 날개가 잉태시킨 도감圖鑑을 골목의 겨울이 완성한다. 고대의 닭이 어느 날을 울어 새벽은 해석 불가능한 경전이 되었다. 눈발 속에서 붉은 종이 검劍을 벼린다. 누가 우리에게 이 검을 주었던가. 검은 스스로 울렁거리는 신전. 그리하여 단 한번 용서를 기다리는 자의 모습으로만 별빛은 날카로워져야 한다. 오직 생生은 자신만을 살해하기 위해 주어진 예배이므로, 육친은 원망이 불가능한 별들의 숙주이므로, 죽은 새의 피안彼岸속으로 영혼을 날려 보내는 일을 주저해야 한다. 누구나 성좌들 속에 자신의 점성술을 넣어둔다. 이것은 또 하나의 악행. 그러고 나는 이 악행을 숭배하였다. 새의 죽음을 살려 날게 했고 푸르른 공증을 선물했다. 부리에 문 나뭇가지로 둥지를 짓게 했고 부화한 어린 새들의 노래로 아침을 불러왔다. 폭풍과 뇌우를 차안此岸으로만 떨어뜨리며 함박눈의 겨울에서 영롱한 은유를 캐냈다. 그러나 지금 한 새의 죽음이 성에 낀 유리창에 박혀 있다. 그렇다면 나는 페가수스를 조류라 해야 하는가, 포유류라 해야 하는가. 아니면 조류이면서 포유류라고. 어느 편을 도감에 채우든 제의祭儀를 원하는 새는 새가 아니다. 나에게는 화장火葬을 원하는 늙은 어머니가 있고 매장을 원하는 병든 아버지가 있다. 화장부터 매장까지의 거리는 내가 걸어야 할 불면으로만 아름답다. 삶이 삶을 용서할 때 비로소 죽음은 온다.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 침묵, 이것이야말로 내가 나를 용서하는 트락타트*다. 별은 지상을 위해 빛나지 않고, 성자聖者는 단 한 번도 당신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김은상 시인

1975년 전남 담양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실천문학》신인상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유다복음』(한국문연, 2018)와 소설 『빨강 모자를 쓴 아이들』(멘토프레스, 2019), 『나의 아름다운 고양이 델마』(멘토프레스, 2019)가 있음.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문학창작 기금을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