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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보림 시인 / 꽃피는 레미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3.

황보림 시인 / 꽃피는 레미콘

 

 

출산이 임박해온 암소가

달동네 무더위 속을 오른다

만삭의 몸으로 보폭을 잃지 않던 엄마처럼

속도를 유지하며 달린다

얼마나 돌고 돌아야 저 언덕까지 피가 돌 수 있을까

늘 한 쪽 방향으로만 회전하는

너와 나와 그들이 섞이는 내장 속

곧 태어날 심장이 꿈틀 거린다

박동 약해질까 봐 몸 닳는 산모

자궁을 수축할 시간도 없이

질척하게 엉긴 살점들을 와르르 쏟아낸다

바닥을 차올라 기둥을 세우며 제 몸 굳히는

모래 사원이 어느 신전보다 뜨겁다

궁핍한 살림에도 식솔들 건사하며

나를 딛고 올라서라

지금도 굽은 등을 내미는 팔순의 엄마

엄마의 밑자리처럼

레미콘의 숨결이 굳어진 든든한 기반基盤

비탈길 오르내리는 엔진소리에

검은 잠에 빠져있던 빈터가

우뚝우뚝 꽃동네를 이룬다

 

 


 

 

황보림 시인 / 붉은 지느러미

 

 

풍랑과 맞서는 것들은

생살에서 지느러미가 돋는다

뜰채를 든 늙은 어부의 의수가

지느러미처럼 꿈틀거린다

 

민물송어 떼들이 바다에 길들여지는 양식장

감전 사고로 두 팔을 잃은 아버지가

수평선에 갇혀 퍼렇게 물들어 간다

 

아버지는 두 딸과 함께 바다를 잃었다 파도를 넘고 넘어야 굵어진다고 지느러미를 돋아준 바다, 시린 갈비뼈 사이로 갯바람이 몰아쳤다 심해를 파고들지 못한 몸뚱이, 허물을 덮어주던 물결도, 식솔들에 묶여 돌아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 막막한 바닥을 차올라 수평선을 팽팽하게 당겨준 지문도 없는 열 손가락

 

양식장이 망망대해인 양, 경계를 넘지 않는 지느러미들 속살이 붉다 가슴 장화가 닳도록 물속을 헤집는 부르튼 발, 그물을 걷어 올리며 헛손질했을 날들, 걸러내는 것이 어디 짜디짠 물뿐이었을까, 걸러진 것이 어디 닳아진 비늘뿐이었을까, 굳어진 혈관 속에서 선지피가 휘돈다

 

갇혀 있는 것들은 날개를 꿈꾸는 법

바다 한쪽에 세 들어 살아도

무지개를 내걸어 물비늘처럼 반짝이는 아버지

순치(馴致)*장은 머지않아 축제장으로 출렁인다는 걸 안다

푸른 심장을 품은 송어 떼들이

쏟아지는 햇살에 만삭의 몸을 푼다

 

바다 피가 흐르는 선홍빛 의수

지느러미 꼿꼿이 세우고

먼바다를 항해하는 아버지

펄떡이는 대물을 번쩍 들어 올린다

 

* 잘 따르게 하거나 부리가 좋게 길들임.

 

 


 

황보림 시인

전북 완주에서 출생, (본명: 황경순), 2011년 <시선> 등단. 시집으로 『물의 나이』, 『꽃피는 레미콘』이 있음. 산림문화상과 건설문학상 외 수상 경력과, 현재 전북시인협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