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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계숙 시인 / 다정한 간격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

홍계숙 시인 / 다정한 간격

 

 

겨울나무 그림자는 간격을 재는 줄자

 

천년을 한 자리에 묶여 사는 나무들은 제 키를 알고 있지 한겨울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걸으면 볼 수 있네 체중이 가벼워진 나무는 발치에서 미끈한 줄자를 꺼내어

 

앙상한 우듬지 빈 둥지와 저쪽 둥지와의 간격을, 굴참나무 껍질 속 사슴벌레들 겨울잠과 봄의 간격을,

 

가로수 길을 걷는 연인들 입술의 간격을

차가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체온까지 재고 있는 것을

 

종종걸음 햇살에 제 키를 맞추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줄자를 늘였다 당기며

너에게서 나에게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슬금슬금 아침에서 저녁까지

 

해마다 나무의 키가 쑥쑥 자라는 건 그 줄자 때문이지 뒤꿈치를 들고 온종일 하늘바라기에 겨울 해가 저무는

 

겨울은 당신과 나의 간격을 재기에 좋은 계절,

너무 벌어져 춥거나

너무 가까워 찔리지 않도록

 

지금 겨울나무는

찬바람과 꽃눈의 간격을 측량 중이지

 

- < 열린 시학> 2020년 겨울호 / 시집 『다정한 간격』

 

 


 

 

홍계숙 시인 / 연못 아래 깊은 방

 

 

진흙 속 깊숙한 방.

줄기로 누워있는

열 개 남짓 터널을 지나면 그곳에 닿을 수 있어요

연꽃의 꽃술을 열고 들어가

꽃대를 지나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수중터널을

수직으로 더름어 내려서요

 

그 깊은 바닥에 눈을 감고 누우면 캄캄한 어둠의 나이까지 셀 수 있어요 물렁하고 걸쭉한 진흙 속을 헤집는 미꾸라지 소리, 진흙 방을 입질하는 가물치 소리, 늙은 비단잉어의 하품 소리, 물풀 사이 선녀 붕어가 사랑을 나누는 소리, 각시붕어가 수초 위에 알을 낳는 소리, 알을 부화시키는 수컷 버들붕어의 지느러미 날갯짓 소리, 비갠 하늘과 도무지 닿을 수 없는 뭉게구름 떠가는 소리까지도 이곳에선 다 들을 수 있어요 공명 깊은 터널 속 밝은 귀를 품고 있는

 

누군가 떨어뜨린 한숨으로 연근을 캐던 뻘 묻은 나이를 짐작하지만,

 

별이 닿지 않는 진흙 안쪽은 시들 일이 없죠

 

연꽃이 피나 봐요

캄캄한 방이 환해지고 있어요

 

- 시집 <피스타치오> / 『다층』 2020 여름호

 

 


 

홍계숙 시인

강원도 삼척 출생. 2017년 《시와 반시》 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모과의 건축학』(책나무, 2017) 『피스타치오』 『다정한 간격』이 있음.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