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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유환 시인 / 늦은 저녁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3.

강유환 시인 / 늦은 저녁에

 

 

급작스레 멀리서 또 기별이 왔다

침팬지나 코끼리도 까마귀나 어치도

동족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글을 읽고 있었다

올해만 해도 벌써 가슴 떨리는 네 번째 소식

태어남보다는 온통 떠나가는 것 일색이어서

오래 울리는 벨이나 떨리는 숨소리로 짐작하고도

애써 다른 이야기로 에두르지만 결국 그 자리

연 맺은 이들과 느루 속내 한번 못 나눴는데

다들 극단적 방식으로 근황을 기척해 온다

시위 주동자로 무기정학당해 졸업이 늦은 이는

월급 털어 넣던 섬으로 출근하다 배가 뒤집혔고

누구보다도 좋은 시대를 꿈꾸며 살던 이는

유서 한 장 없이 십오 층에서 낙하해 버렸다

편한 잠 한번 안 자고 무료 봉사 일삼던 친구는

단단히 뿌리내린 병의 숙주가 되었고

비정규직으로 맞짱 뜨며 강하게 살던 사촌은

퇴근길 자전거 앞쪽이 차에 받혀 즉사했다

아무리 이 바닥이 규칙 따윈 없다 해도

어찌 매번 이리 사이드로 몰래 들어오는가

어떤 코끼리들은 마지막 날 미리 알고

먼 동굴 홀로 찾아가 삶을 끝맺는다는데

가름할 순간마저 얻지 못한 이들 위해

늦게나마 예 갖추어 작별하지만

반칙을 법칙으로 삼은 비겁한 승자는

판 엎으며 다시 이리 흔들 테고

전화벨 소리는 오래 울려댈 테고

고요히 동굴에 못 들어간 이들 불러내어

이렇게 울먹거리며 어깨를 들썩일 뿐

늦은 저녁 못 넘기고 가슴이나 칠 뿐

 

강유환 <고삐 너머> 천년의 시작 2020

 

 


 

 

강유환 시인 / 고삐

 

 

한세상의 결정관처럼 아름다운

다나킬 대평원*의 소금밭에서였어요

커다란 햇덩이가 원초적으로 떠있고

카라반 행렬이 불타는 노을로 퇴장하는

잡지 속 사진 같은 장관을 기다렸지요

 

역광 속에서 등장한 귀여운 주인공들이

노을 배경으로 모여 몸을 맞대었어요

꼬리뼈 부터 목덜미까지 소금을 매달고

덩어리 무게를 앙버티던 나귀가

앞다리를 꺾고 허공을 발길질 하였지요

고함과 채찍이 세차게 지나가도

미동도 하지 않고 휴식과 맞바꾸는

어린 나귀 옆, 네발 달린 동물들처럼

허리를 펴지 못하는 늙은 인부들이

마른 다리에 붙은 소금버캐를 떼었어요

 

매혹적으로 반짝이는 평원의 앵글 밖

거대한 종양같이 불거진 해를

숙명처럼 이고 살아가는 소금 사막

벗어날 수 없는 핏빛 풍경들

채굴 하듯이 줌인 할 때마다

깊이 파고든 줄들이 끌려 나왔어요

어스름 그때 누군가 제 목을 당겼지요

 

* 다나킬 대평원 : 에티오피아 북동쪽 에리트레이 국경과 인접한 건조한 사막 지대. 지구에서 가장 뜨거운 곳으로 알려졌다. 천연 소금밭에서 암염을 캐어 파는 아파르 부족이 산다.

 

 


 

 

강유환 시인 / 입말

 

 

연항아리 덮은 물이끼 보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은 “잉끄”

 

말라버린 연못 흙속에

수 백년 넘게 잠들었다가

발견되어 싹이 튼 연밥처럼

몸 어느 바닥에 엎드려 있었을까

오래된 말들이 굴러 나온다

 

가마는 가매꼭지 뒤통수는 뒤꼭지 턱은 턱아지 엉덩이는 넙덕지 왼손은 외약손 솜털은 부동털 뒷덜미는 데시기 주근깨 주겅씨 복사뼈 복성씨

 

라임도 치수도 척척 맞는 모어들

 

온 몸 이랑에 숨어

간질간질한 씨앗들 모아

교양있는 글말 두둑에 뿌린다

 

미수 88세 넘기시고

봄물이 올랐다

 

 


 

강유환 시인

전남 무안에서 출생. 전남대학교 국어교육과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2000년 계간《시안》가을호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꽃, 흰빛 입들』(시안, 2012) 이 있고, 논저 『존재, 그 황홀한 부패』 『매혹과 크레바스의 형식』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