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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미산 시인 / 다뉴브강의 신발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3.

이미산 시인 / 다뉴브강의 신발들⁕

 

 

우리가 버린 것들의 기분을 다 모아도

저 어처구니에 닿지 못하리

 

엄마는 모든 버려지지 않으려는 고집을 모아

아이를 끌어안았으니

 

남겨진 신발의 용도란

소용없는 것들의 기록

 

역사를 일으켜세우는 기록이 있고

발가락을 숨기는 예의바른 기다림도 있지만

신발은 사실적인 이별을 예감하진 못한다

용서도 없이 멈춰버린 심장처럼

 

이정표가 지워지면 처음을 가리키는 구두코

몸이 사라져도 중심을 기억하는 뒤축

 

꿈인 듯 농담인 듯

사라진 발을 찾는 신발들의 아우성

 

끌어안은 발자국들 지워질까

강물은 영영 잠들지 못한다

 

* 나치군에 학살된 유태인들을 위하여 애도의 징표로 헝가리 다뉴브강가에 조각된 신발들.

 

 


 

 

이미산 시인 / 수건의 비망록

 

 

내가 닦아줄 수 없는

너의 물기,

 

그때 우리의 포옹은 길어

 

몸 밖으로 흐르는 대낮의 은하수

 

섣부른 위로가 끼어들지 않게

늙은 계절이 자장가를 부른다

쉽게 꺼내 쓰고 쉽게 던져버린 엄마들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되돌아오는 동안

 

흔하고 헛된 엄마들이

한 명의 거대한 엄마로 변신하는 동안

 

그리하여 낡고 헐렁해진 삶이라는 덫에

우리의 흔적이 입혀지면

 

저 먼 곳의 은하수,

하도 헹궈져 눈이 먼 엄마들의 행렬

 

 


 

 

이미산 시인 / 지하상가 옷 수선 집

 

 

재봉틀이 밟고 지나간 길들은

깊고 아득한 동굴 속으로 내려간다

막다른 골목의 출입구도 없는

 

한 발 비껴난 어둠이 시계처럼 조용히 지켜보는 방

돋보기를 낀 여자가 한 뜸 한 뜸 경전을 읽어내듯

바느질 중이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세상이 꿈속인 듯

끊어진 실을 이으며 부지런히

옷을 돌본다

 

구겨지고 찢긴 것들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그 위로 낡고 때묻은 시간들 그림자처럼 겹쳐진다

바람에 삭은 어깨 사나운 햇빛에 찔린 옆구리

장마에 탈진한 호흡들

서로 엉켜 이명처럼 잦아드는 소리에 뒤척이며

순서를 기다린다

여자는 헐거워진 몸을 만져보고 불빛에 비춰보고

숨어있는 틈을 찾아낸다

휘어진 뼈를 세우고 새 살을 채워 넣는다

전신을 허물어 새로운 체형을 만들기도 한다

좁은 길처럼 나있는 곡선의 솔기가 미어지지 않게

촘촘한 박음질로 고정시킨다

수선을 끝낸 것들 등뼈를 곧게 세우고 거울 앞에 선다

총총히 사라진다

 

사람들은 조용히 낡은 옷을 놓고 간다

온갖 낡은 것들의 어둠침침한 집은

세상의 시선 밖에서 분주하다

 

 


 

 

이미산 시인 / 날

 

게으르게 누워있던 칼이

내려꽂힌다, 도마 위의 고등어를 향해

배고픈 매의 눈알처럼 번쩍이며

피가 튄다 붉은 내장이 끌려나온다

도마 위에서 피 맛을 즐기는 저것은

칼의 혀

칼의 살 속으로 저며 드는 칼의 날

 

고등어를 자르고  

고등어 속 바다를 자르고

바다 속 어둠을 자르고

어둠의 실핏줄을 자르고

검붉은 녹을 자르고 불안을 자르고

피 묻은 옆구리를 자르고

환한 중심 속에 입맛을 다시는

칼의 눈

 

시장의 소음들, 단잠을 삼킨 바다가 가라앉는다

고요하게 잠든 칼

제 잠을 베고 제 어둠을 베고 제 몸을 베고

하얗게 빛나는 허기

누군가 날을 벼리고 있다

 

 


 

이미산 시인

1959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문과 졸업.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6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아홉시 뉴스가 있는 풍경』(한국문연, 2010), 『저기, 분홍』(현대시학, 2015)이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