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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태랑 시인 / 뒷사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3.

최태랑 시인 / 뒷사람

 

 

흰 모시적삼 아버지

중절모에 팔자걸음이 앞서가고

누런 베적삼 어머니는 열무 단을 이고 따라간다

힐끗 돌아보며 왜 이리 더디냐고

타박하던 아버지

 

한껏 치장한 젊은 며느리

깃털 같은 손가방 들고

아들은 아이 안고 기저귀가방도 들었다

뒤를 보며 늦었다고

짜증내는 며느리

 

힘든 것은 언제나 뒤쪽에 있다

 

- 시집 『물은 소리로 길을 낸다』(천년의시작, 2015)

 

 


 

 

최태랑 시인 / 정글戰

 

 

퇴직금 털어 피자집을 차린 부부

대박을 꿈꾸며 정글 속으로 갔다

귀를 쫑긋 세우고 프랜차이즈 전술을 배운다

 

이 정글의 터줏대감은

한자리에 십팔 년, 수천 마리 닭모가지를 비틀어

장작불을 지핀 노부부,

산전수전 다 거친 백전노장

 

좁은 땅 한 달에 칠천 명이 지원하여

오천 명이 도태되는 전쟁터

열에 일곱은 삼개월안에 삼십육계 한다

 

피자 한 판에 할인가 만 구천 원

다음날 옆집은 만 삼천 원, 손익분기점이다

대박은 꿈도 꿔보지 못하고 시들었다

 

정신무장한 스파르타 군이라도

물량공세 페르시아 군을 막지 못하고

옆집 통닭은 삼 년 전쟁에 패하고 말았다

길 건너 돼지는 팔 년 만에 깃발 꽂는 순간

강제명도집행에 쫓겨날 신세, 권리금 족쇄 풀지 못하고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다

부인은 파출부, 남자는 벽돌을 지는 날품팔이 패잔병

 

친구마저 떠난 자리

정글戰에서 만난 빚이란 친구가 슬그머니 와있다

 

「현대시학」2014. 6월호

 

 


 

최태랑 시인

1942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2012년 《시와 정신》으로 등단. 시집으로 『물은 소리로 길을 낸다』(천년의시작, 2015)와 『도시로 간 낙타』(천년의시작, 2019)이 있음. 수필집으로 『아버지 열매(2008)』, 『내게 묻는 안부』가 있음. 2015년 전국계간지 작품상, 2011년 인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