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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주호 시인 / 나무 심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0.

전주호 시인 / 나무 심기

 

 

금산 진악산 자락

석동지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작은 농막을 지어놓고

요즘 울타리 수종으로 가장 핫 하다는

에메랄드그린, 여든 여섯 그루를 심는다.

 

남자는 구덩이를 파고 여자는 돌을 골라낸다.

나무가 곧은 뿌리 내릴 수 있게

상토를 충분히 넣어주곤

흠뻑 준 물이 스며들기를 기다린다.

 

마사토는 언제 물을 먹었냐는 듯

시치미를 뚝 뗀다.

이리 척박해서야 뿌리 내리겠나 싶어

여자는

나무 밑에 상토를 수북하게 올려준다.

 

- 구덩이 속에 넣어줘야 뿌릴 내리지.

상토는 뿌리가 잘 내릴 수 있도록 멸균 처리된 부드러운 흙이야.

나무 위에 뿌려봤자 양분은 없어.

 

남자가 무심히 말하는 순간

여자는 아찔한 허방다리를 짚었다.

메마른 마사토에서 태어난 건 바로 여자 자신

두 아이의 울타리로 심어졌지만,

그저 가식 된 묘목일 뿐

땅속 깊이 뿌리 내리지 못했다.

평생 목이 말랐다.

 

이제 여자는

구덩이 가득 상토를 넣고 물을 흠뻑 준 다음,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다가

결혼한 지 30여년이 지나도록 뿌리 못 내린

여자를 기꺼이 심기로 했다.

 

부드러운 흙에 빠진 맨발에서부터

긴 치맛자락 위까지

물이 찰박찰박 차오른다.

 

 


 

 

전주호 시인 / 목척교 화원에서

 

 

목척교 옆 골목 입구

아담한 꽃집 하나 있다

 

그녀의 신접살림집을 방문하던 날

그 집에서 군자란과 오채각을 샀었다

 

30여년이 흐른 후

다시 찾은 그녀의 집

 

겨우 두 잎이던 군자란은

서너 뿌리나 거느린 가장이 되어

실한 꽃대궁 서너 송이 피워냈고

 

뿌리도 없이 작은 화분에 담겨 있던

오채각은

몇 번이나 가지를 쳐내야 할만큼 실하게 자랐다.

하지만, 푸른 잎을 보인 적은 없단다.

날카로운 가시만 세우고 있단다.

 

눈물로 축축한

그녀의 정원에서

 

군자란은 말없이 꽃송이를 달고

오채각은 사정없이 제 몸을 찌르며

허연 눈물 뚝뚝 흘리는 것이다.

그러다 잎도 없는 맨몸에 화사한 꽃을 게워내는 것이다.

 

돌아가는 나를 배웅하러 현관에 선

그녀가 군자란으로 핀다.

 

그녀가 오채각으로 핀다.

 

 


 

전주호 시인

충남 부여에서 출생. 1999년 《심상》 신인상과 2002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학습지공장의 민자〉 당선. 시집으로 『슬픔과 눈 맞추다』(고요아침, 2006)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