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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준 시인 / 종암동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0.

박준 시인 / 종암동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느 날 내 집 앞에 와 계셨다

 

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

 

왜 우시냐고 물으니

사십 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 홀로 살던

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

 

 


 

 

박준 시인 / 생활과 예보

 

 

비 온다니 꽃 지겠다

 

진종일 마루에 앉아

라디오를 듣던 아버지가

오늘 처음 한 말이었다

 

 


 

 

박준 시인 / 인천 반달

 

 

혼자 앓는 열이

적막했다

 

나와 수간(手簡)을

길게 놓던 사람이 있었다

 

인천에서 양말 앞코의

재봉 일을 하고 있는데

 

손이 달처럼 자주 붓는 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나는 바람에 떠는 우리 집 철문 소리와

당신의 재봉틀 소리가

아주 비슷할 거라 적어 보냈다

 

학교를 졸업하면

인천에 한번

놀러가보고 싶다고도 적었다

 

후로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에

흰 양말 몇 켤레를 접어 보내오고

연락이 끊어졌다

 

그때부터 눈에

반달이 자주 비쳤다

 

반은 희고

반은 밝았다

 

 


 

박준 시인

1983년 서울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2008년 《실천문학》에〈모래내 그림자극〉이 당선되어 등단. 2012년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출간, 2013년 제31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 두 번째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2019.06. 제7회 박재삼문학상 수상. 창작과비평사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