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란 시인(상주) / 아득한 아카펠라
이 유리꽃병은 헐벗었어요 유리주의, 헐벗은 것은 작은 실수에도 깨질 수 있어요
유리꽃병에서 꽃들이 최후의 만찬을 나누고요 반주가 없는 그림을 그린 후 화가는 헐한 매독으로 죽었어요
화가의 마지막을 지킨 것이 미처 재가 되지 않은 꽃들이라는 것은 죽음에 가장 어울리는 폐허의 장르가 꽃이라는 말일까요 마지막 한 호흡까지 숨을 다해 지켜야 할 음표들 꽃들의 허기 진 옥타브까지 올라가야 간신히 예술이 꽃핀다는 말일까요
투명한 유리꽃병이 물에 담긴 들숨의 허술한 줄기를 보여주고요 투명하다는 것은 없는 뿌리를 있는 대로 보여주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꽃의 허전한 목젖을 조금 왜곡한다는 것이지요
피아노 페달에 기대지 않는 무반주의 허약한 몸이 제 안에서 조율된 꽃대를 꼿꼿이 세워 허영을 걷어낸 딸림화음을 꽃 피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호흡의 뿌리는 깊은 곳에서 시작하지만 실은 유리가 헐벗은 채로 보여주려 한 것이 뿌리를 대신하는 줄기이고 꽃이 하루라도 더 싱싱하기 위해 물기 촉촉한 성대가 부지런히 숨의 뿌리를 빨아올려야 한다면 화가는 투명한 호흡을 그린 것일까요
오래 전 투명이 깨어진 삶은 불협화음으로 가득하고 가위는 가장 화사한 순간에 꽃의 목을 자르고
오래전에 죽었는데 살아남은 꽃병 뿌리가 괴사하고 난 후에도 여전히 화사한 꽃들 꽃들이 다 지도록 무사한 꽃병 꽃이 담긴 채로 창문을 향해 날아가는 꽃병 이 모두가 투명한 목숨의 증인이 되지만 실은 화가가 그린 것은 투명한 목소리 일까요
환멸이 절반인 사랑이든, 한 번도 분홍빛인 적 없는 젖꼭지이든 썩어가는 내면을 끌어올려 들려주는 노래이든 투명한 것들은 깨어지기 쉽고 철 없이 내지르는 꽃의 가성이 유리꽃병 가득 피어나는데
깨어져야 할 때 깨어지지 않는 것들은 더욱 끔찍하다는 것일까요
계간 『시와 사람』 2021년 가을호 발표
최정란 시인(상주) / 단골이 되기에 너무 늦은 술집은 없다
빨리 취하고 싶어 단골이 되기로 한다 막다른 골목 드르륵 소리 나는 유리문을 밀면 생의 절반을 바다에서 보낸 바텐더가 기다린다
만조의 슬픔 한 잔에 한껏 밀려올라가는 광대뼈 깊이를 알 수 없는 수심 한 잔에 꼬리가 풀리는 입술 빙산의 농담 한 잔에 턱수염을 뚫고 쏟아지는 웃음소리
목이 쉰 해적판 음악이 술을 부르는 것처럼 불타는 물의 노래가 마른 입술을 부르는 것처럼 월요일 아침이 금요일 저녁을 부르는 것처럼 단골이 되면 언제라도 취할 준비가 된다
사월 봄바다의 단골이 되면 사월에 취할 수 있다 시월 단풍의 단골은 시월에 취할 수 있다 시간의 단골은 이미 시간에 취해 있는데 세월의 바다의 단골이 되자면 무엇에 취해야 할까
무엇이 중요한데, 무엇이 중요한데, 무엇이 중요한데 주문처럼 외우며 파도의 시간에 골똘히 취해가는 절벽의 뿌리들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없어
다가오는 어둠에 태풍의 배경을 맡기고 서 있는 나무들 서쪽바다의 단골이었다는 듯 안주도 없이 노을에 취한 얼굴들 일찌감치 붉어지고
아무 것도 두려워 할 것 없어
잎들 한결같이 바람의 입을 빌어 속삭이지만 아닌 밤중, 어둠의 천막을 뚫고 쏟아진 우박에 잔가지가 드러난 나는 아무것에도 취한 적 없는 앙상한 마른 가시 같은 전생을 들킬까 전전긍긍이다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 장화가 반쯤 벗겨진 고양이처럼 아스팔트 위에서 비틀거렸을까 말라비틀어진 물고기 한 마리 입에 물고 밀물에 쫓기듯 외상이라고는 없는 인생을 필사적으로 꿈꾸었을까
왜 그렇게 비틀거리지 않으려 애썼을까 비틀거리다 다시 비틀거려도 좋을 것을 조금 비틀거려도 괜찮아 더 많이 비틀거려도 괜찮아 비틀거리는 것을 믿어도 좋을 것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조바심과 안간힘 내려놓고 내 안에 숨은 바다의 느슨한 단골이 될 수도 있을 것을
왜 그렇게 취하지 않으려 애썼을까 깊이 취해야 제 속을 한 마디씩 보여주는 삶의 구애를 왜 그렇게 애써 외면했을까
최선을 다해 삶의 단골이 되기로 한다 삶의 바닥의 바닥까지, 삶의 끝의 끝까지 만취한 나를 세상이 징글징글한 단골이라고 부를 때까지
계간 『시산맥』 2021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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