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시인 / 종암동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느 날 내 집 앞에 와 계셨다
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
왜 우시냐고 물으니 사십 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 홀로 살던 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
박준 시인 / 생활과 예보
비 온다니 꽃 지겠다
진종일 마루에 앉아 라디오를 듣던 아버지가 오늘 처음 한 말이었다
박준 시인 / 인천 반달
혼자 앓는 열이 적막했다
나와 수간(手簡)을 길게 놓던 사람이 있었다
인천에서 양말 앞코의 재봉 일을 하고 있는데
손이 달처럼 자주 붓는 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나는 바람에 떠는 우리 집 철문 소리와 당신의 재봉틀 소리가 아주 비슷할 거라 적어 보냈다
학교를 졸업하면 인천에 한번 놀러가보고 싶다고도 적었다
후로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에 흰 양말 몇 켤레를 접어 보내오고 연락이 끊어졌다
그때부터 눈에 반달이 자주 비쳤다
반은 희고 반은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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