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화 시인(삼천포) / 미화
흙 묻은 몸에 노란 꽃대 꽃대들
겨울 지나고 봄 친정집 텃밭에서 택배로 보내져온 무 한 자루
고향에서 나는 아름다운 꽃이었다 통새미 배꽃이었다가 팔포역 매화 꽃이었다가 동구 밖 복사꽃이었다
그를 만났고 그를 사랑했고 그의 아기들을 낳았다 그가 죽고 나는 이름을 바꿨다 美花에서 미화美和, 이름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고 꽃 색깔을 바꿨다 배꽃 매화꽃 복사꽃 세상의 온갖 꽃들을 다 눌러 삼켰다 그랬더니 부품이 됐다
지난 겨울 그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저렇게 노랗게 꽃대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니,
나는 친정집 텃밭에서 택배로 보내져 온 자루 속 무꽃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짓는다
지하에서 피워 올린 너와 나의 미소
환하다.
이미화 시인(삼천포) / 몽돌
신수도 앞바다에 몽돌이 널려 있다 파도가 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바다 밖으로 밀려 나온다
저 몽돌들, 바다의 심장 같다 바다에도 심장이 있는 것 같다
검다 밀려 나온 돌들은 검다
바다가 다가올 때마다 차르르 차르르 아픈 소리를 낸다
나, 저 몽돌처럼 내 심장 꺼내놓고 살았다 새카맣게 속이 타서 살았다
내 몸속에 있지 못하고 빠져나온 심장은 오늘도 박동 대신 차르르 차르르 파도소리를 낸다
이미화 시인(삼천포) / 1인 시위
옆에 가 슬쩍 손이라도 얹어 주고 싶다 시청 앞 광장 한때는 우리도 화분에서 컸던 꽃, 지금 와서 깔보지 말라고 보도블록 틈에 겨우 비집고 앉아 버티고 있다 밀리고 밀려 더는 물러설 곳 없는 기초생활수급자 노란 피켓 든 민들레 한 송이
-이미화, 『치통의 아침』, 황금알, 2018.
[201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미화 시인(삼천포) / 허氏의 구둣방
발 끝에 달을 달고 저녁 강을 건너고 있는 허氏 구름처럼 떠돌았으므로 그의 생은 한쪽만 유난히 닳은 구두처럼 삐뚜름하다 그의 구두처럼 다 허물어져가는 옥봉동 산 1번지 아파트에 조등처럼 별이 걸릴 때 저녁하늘은 가난한 마을의 착한 지붕을 건너가면서 지상의 가장 낮은 바닥부터 따뜻하게 어루만져준다 이동전화기 판매점에 다니는 착한 처녀의 구두 뒷굽을 갈아 끼우던 허氏의 남루한 저녁에 잠깐 화사한 웃음이 번진다 이동식 컨테이너 박스에 맞춘 그의 굽은 등 뒤로 따각 따각 처녀의 발걸음이 이동전화기 전화 연결음으로 터진다 중심을 놓고 뒷굽을 맞춘 구두가 흔들린다 일용할 하루의 노동이 땀 내음 밴 구둣방을 넘보기도 하지만 늘 기우뚱 한쪽으로만 기우는 그의 세상에서 수선 중인 구두는 기운 없는 그의 한 쪽 무릎에서 완성되는 절망이 키운 꿈이다 다시 언제 그의 세상이 흔들릴지 모르지만 이미 구두 뒤축이나 밑창만으로 키워 놓은 환한 세상이 그에게선 자라고 있다 하나 둘 찾아와 박힌 별들의 뒷자리로 들던 그가 창문에 걸린 어둠을 후다닥 걷어내고 달빛 속에서 주춤거린다 볼이 넓고 우직한 신발 속 그의 한쪽 발이 나머지 발의 오늘을 타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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