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소연 시인 / 그늘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9.

김소연 시인 / 그늘

 

 

벚나무는 천 개의 눈을 뜨네

눈동자도 없이

눈꺼풀도 없이

 

외투를 세탁소에 맡기러 가는 길과

교회의 문전성시와

일요일과

눈썰매와

 

벚나무는 곧 버찌를 떨어뜨리겠지

벌써 나는 침이 고이네

 

거미처럼 골목에 앉아

골목에 버려진 의자에 앉아

출발도 없이

도착도 없이

 

벌거벗은 햇볕

벌거벗은 철제 대문

그늘에 앉아 젖은 무릎을 말리네

해빙도 없이

결빙도 없이

 

북극여우와 바다코끼리와 바다표범과

흰 무지개와 흰 운무와

쇄빙선도 없이

해협도 없이

 

버찌는 잠시 돌 옆에 머물겠지

개미는 버찌를 핥겠지

혓바닥도 없이

사랑도 없이

 

 


 

 

김소연 시인 / 바깥

 

 

얼굴은 어째서 사람의 바깥이 되어버렸을까

 

창문에 낀 성에 같은 표정을 짓고

당신은 당신의 얼굴에게 안부를 물었다

 

안에 있어도

바깥에 있는 것 같아 바깥으로 나와버릴 때마다

안쪽은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 집에 가자며 누군가 손을 내밀 때

거긴 숙소야, 나는 집이 없어

당신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비바람에 우산들은 뒤집히고

상인들은 내다 걸은 물건들에 비닐을 덮어주고

행인들은 뛰거나 차양 아래에 멈춰 섰다

 

처마랄 것도 없는 처마 아래에서

잠자리 두 마리가 교미를 하고 있었다

꼬리를 바르르 떨었지만 고요함을 잃지 않았다

 

꼬리는 어째서 그들의 바깥이 될 수 있었을까

 

사나운 꿈은 어째서 이마를 열어젖히는가

낯선 짐승들이 한 마리씩 튀어나와 베개를 짓밟아서

꿈 바깥으로 당신은 자꾸 밀려났다

 

당신은 다시 잠이 들었다

얼굴을 벗어

창문 바깥에 어른대던 저 나뭇가지에다

걸어둔 채로

 

당신의 바깥은 이제 당신의 얼굴을 쓰고 있다

안으로 들어오겠다고 당신의 방을 밤새

부수고 있다

 

 


 

 

김소연 시인 / 다른 이야기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너는 매일매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어떤 용기를 내어 서로 손을 잡았는지 손을 꼭 잡고 혹한의 공원에 앉아 밤을 지샜는지. 나는 다소곳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우리가 우리를 우리를 되뇌고 되뇌며 그때의 표정이 되어서. 나는 언제고 듣고 또 들었다. 곰을 무서워하면서도 곰인형을 안고 좋아했듯이. 그 얘기가 좋았다. 그 얘기를 하는 그 표정이 좋았다. 그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좋았다. 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 그날을 여기에 대려다 놓느라 오늘이 한없이 보류되고 내일이 한없이 도래하지 않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떠나가는 게 좋았다. 귀여운 병아리들이 무서운 닭이 되어 제멋대로 마당을 뛰어다니다 도살되는 것처럼. 그날의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마다 우리가 없어져버리는 게 좋았다. 먹다 남은 케이크처럼 바글대는 불개미처럼. 그날의 이야기가 처음 만났던 날을 깨끗하게 먹어치우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아직도 혹한의 공원에 앉아 떨고 있을 것이 좋았다. 우리가 그곳에서 손을 꼭 잡은 채로 영원히 삭아갈 것이 좋았다.

 

 


 

 

김소연 시인 / 경배

 

 

나쁜 짓을 이제는 하지 않아

나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지

 

좋아하는 친구가 베란다에서 키운 부추를 주어서

나란히 누운 부추를 찬물에 씻지

좋아하는 친구가 보내준 무쇠 프라이팬에 부추전을 부치지

젓가락을 들고 전을 먹는 동안에

 

나쁜 음악을 이제는 듣지 않아

나쁜 생각들을 완성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

부추를 먹는 동안엔 부추를 경배할 뿐

 

저편 유리창으로 젓가락을 내려놓는

너의 모습이 보였는데

왜 그렇게 맨날 억울한 얼굴이니

 

병이 멈추었니

비명이 사라졌니

 

나의 병으로 너의 병을 만들던 짓을 더 해주길 바라니

예의를 다해 평범해지는 일을 너는 경배하게 된 거니

참 독하다 참 무섭다 하면서

너를 번역해줄 일이 이제는 없겠다

 

모든 게 끔찍한데

가장 끔찍한 게 너라는 사실 때문에

너는 누워 잠을 자버리지

다음 생애에 깨어날 수 있도록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모든 것에 익숙해져버렸지

익숙해져버린 나를 적응하지 못한 채 절절매지

젓가락을 들어 올려

전을 다 먹을 뿐

 

만약 이 세상이 대답이었던 것이라면

그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더 강하고 더 짙은 이 부추였을까

병이 멈추어버린 병은 어떻게 아픈 척을 해야 할까

 

부추를 받고 귀여운 인형을 친구에게 건넸지

무쇠 프라이팬을 받고 예쁜 그림책을 친구에게 건넸지

귀엽고 예쁘게

여리고 선량하게

 

혼자 있을 때마다 나쁜 것들만 떠올리는데

나쁜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아

가지런한 부추들

파릇한 부추들

 

 


 

김소연(金素延) 시인

1967년 경북 경주에서 출생, 가톨릭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 국문과(석사)를 졸업.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극에 달하다』『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눈물이라는 뼈』『수학자의 아침』 등, 산문집으로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한글자 사전>,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등.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 중. 2010년 제10회「노작문학상」, 2011년 제57회「현대문학상」수상. 2020. 제21회 현대시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