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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세실리아 시인 / 물오리 가족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9.

손세실리아 시인 / 물오리 가족

 

 

호수공원 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때마침 그 밑을 지나던 물오리 가족을 만났습니다

어미가 앞장 서 갈퀴발로 터놓은 물의 길을

여남은 마리의 새끼들이 올망졸망 뒤쫓고 있습니다

 

떼로 몰려다니며 수선스러워 보이지만

묵언정진 중인 수련 꽃잎에 생채기내는 일 없고

빽빽한 수풀 마구잡이로 헤집고 다니는 듯 보이지만

물풀의 줄기 한 가닥 다치는 법 없이 말짱한 것이

하늘에 길을 트고 국경을 넘나드는

철새들의 비행과 별반 다를 바 없었는데요

 

왜 유독 사람이 다녀간 길 언저리에는 상처가 남는지

꽃 지고 새소리 멎어 온통 황폐해지고 마는지

 

 


 

 

손세실리아 시인 / 별의 부름을 받다

 

 

청동의 몸을 빌어 별무리를 낳고

피의 유월 자유의 함성을

돌멩이 불끈 쥔 손아귀로 빚어놓던

한 그가 있었다

 

못가진 자 배고픈 자 핍박받는 자들의 아군이던

한 그가 있었다

 

잘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이대리를

사무실 바깥으로 끌어내 전시장에 세우고

술취한 새벽 귀갓길

버려진 개 앞에서 노상방뇨하는 중년 사내의

축처진 물건을 통해 이 시대 아빠들의 청춘을 노래하던

한 그가 있었다

 

허나, 내가 그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별이 된 후였고

이 지구상 어디에서도 그와 마주칠 우연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짓말처럼 그가 왔다

말문을 터 나를 찾았다

외마디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이봐, 친구!

거대한 어떤 음모가 나를 모함하고 있어

나를 해치려 해

이 일을 어쩌면 좋지? 응?

 

한 그가 지상에 머물던 서른여덟 해

그의 자취 갈수록 또렷하기만 한데

그것들 깡그리 지우려 하다니

묵살하려 들다니

재차 죽이려 하다니

빌어먹을!

 

한 그가 있었고

우리는 그를 조각가 구본주라 부른다

죽었으나 살아 별이 된 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해주어야 옳지 않겠나

 

이봐, 친구!

우리가 누군가 친구 아닌가

우릴 믿지? 그까짓 음모쯤이야 모함쯤이야

걱정 붙들어매!

 

- 조각가 故 구본주 소송(삼성화재)해결을 위한 일인시위 / 낭송시

 

 


 

 

손세실리아 시인 / 인사동 밭벼

 

 

인사동에서

발목까지 잘박잘박 눈물로 차 오른 밭벼를 보았다

숙련공처럼 씨알마다 포말 가득 채우고도

정갈한 바람 한 점 수태시키지 못해

뒤엉켜 쓰러지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기립의 슬픈 생애을 보았다

이 시대 깨어있는 자들의 전생이

고서상 목선반 묵은 먼지되어

더께 낀 전설쯤으로 휘어져 버린 저 길목 어디쯤에

산길 먼 촌동네 전구알같은 벼이삭

그 새끼친 알곡의 조각난 꿈을 보았다

 

추분秋分 넘긴 파리한 살갗

겨울갈이 꽃배추에게 몇 뼘 밭뙈기 내어 주고

종로구청 쓰레기 수거 차량 잡쓰레기에 몸 섞기 전,

누군가 밤새 몰래 베어다가 새벽 말간 물에 불려

지상의 어떤 아름다운 단 한 사람을 위한

이승의 밥으로 지어져 주발에 고봉으로 담겨지기를

 

지하철 3호선 대화행 막전철이 오고 있다. 저기

사람들이 타고 또 내린다

 

 


 

 

손세실리아 시인 / 한라산

 

 

제주 12번 해안도로 옆 알작지에는

월세 단칸방 기름보일러 멎은 지 오래여도

술 마시고 구두 끈 오래 묶지 못해

뒤축 꺾은 채 계산대로 직행하는 성미 급한

목수 한 사람 살고 있는데요

 

택시기사 시절이었다지요 아마, 사무실 직원 중에 휠체어

아니면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전화교환원이 있었더랍니다

비번 날, 술이 거나해져 귀가하는데 말입니다 한창 나이에 연애

한번 못 걸어보고 더더군다나 외지출입은 꿈도 못 꿔봤을 여자가

눈에 밟히더라나요 뭐라도 먹여야 두 다리 뻗고 잠들 것 같아

가슴에 김밥 한 줄 품고 식기 전에 달려와서는 늙은 아비처럼 권하는데

이 여자 목이 메어 한 입도 넘기지 못하더라네요 그런 인연으로

살림을 합친 사람들이니 평생 안 싸우고 살 것 같지만요 그들도

여느 부부처럼 이따금 사네 못 사네 험하게 다투기도 한다는데요

그런 이튿날이면 아내를 등에 업고 해안에 나가 뜨는 해를 꼭 바라본다는

 

삼나무 향 짙게 밴 민박집에 삯일 나왔던 그를

술자리에 끌어들였다가

인간시대에나 나올법한 사연을 귀동냥 했는데요

섬사내의 순정에 먹먹해져 나도 모르게 그만

한라산*을 한입에

탁! 털어 넣고 말았습니다.

 

 


 

손세실리아 시인

1963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 2001년 《사람의 문학》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기차를 놓치다』(애지, 2006) 『꿈결에 시를 베다』가 있으며 산문집 <그대라는 문장>이 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시분과 간사. 현재 제주도에서 카페, 갤러리, 서점 '시인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