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춘 시인 / 시작의 습관
해가 산기슭 가까이 다가가 마당은 모닥불을 지피고 뜰 한쪽엔 딸기 납작하게 엎드렸다 줄줄이 작은 열매들 몸을 숨겼다 나무 의자는 잔디밭의 어스름을 누르며 주저앉는다 텃밭 한 쪽에 드문드문 서 있는 비스듬한 외등 흐릿하게 뜰에 비친다 쥐들이 자주 닭을 넘보는 닭장 철조망의 구멍을 막는 일 손보던 일꾼들이 손을 씻고 떠난 후 어둠은 알을 품듯 호젓하게 뜰을 감싸 안는다 울타리 너머에 저녁별 하나 비치다 사라진다 시도 내 마음속에 잠깐 비친다, 길게 품으로 했지만 밤 깊어가고 머릿속 줄줄이 딸려 나오던 말들이 희미한 별들과 함께 잠속으로 빠져든다 닭들도 조용히 별 꿈을 꾼다
- 시와 사상 2012 가을호 -
임재춘 시인 / 잡념
간밤에 일찍부터 꿈을 꾸었다 불면과 잡꿈과의 사이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을 썼다 꿈꾼 이야기도 많이 집어넣었다고 죄를 짓고 멀리 도망갈까? 총 앞에 서보기도 했다고 그의 깊은 잠의 안쪽에 천부적 문장이 도사리고 있다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게 쓰고 싶었다고
시인도 소설가도 잡계급에 속한다는 번역가의 말이 맘에 콕 들어박혔다 자다가 깨어 시랍시고 시답시답 쓰는 밤 창문은 너무 빨리 밝아왔다 내 신분에 맞는 잡다한 일이 하루 종일 가득하다 씻은 손을 또 씻었다 손 닦고 또 쓰고 씻어도 모자란 죗값을 다 갚을 수 없다 잡념이 나를 품었다
임재춘 시인 / 끝물
더덕 꽃이 울타리에 종소리로 매달려 있다 백일홍은 씨방을 키우고 기다란 대궁에 늦옥수수 수염이 말라간다 나팔꽃 줄기 매달린 전봇대 밑에 소리로 여물어 가는 끝물, 해 오르기 전 축축한 참깻단을 베 온 아낙 톨톨한 가을볕을 만나야 뽀얗게 고스란히 빠질 것이다 입 다문 씨로 머문다는 것은 한생의 제 소리를 마감하는 것, 지상에 매달려 있는 울음이다 처마 위에 켜 있는 한가위 달은 가장 큰 지구의 가로등, 꺼졌다 켜지는 데 일 년이 걸린다 그림자가 내 몸을 끌고 달 속으로 환하게 들어간다
-임재춘 시집 『오래된 소금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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