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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재춘 시인 / 시작의 습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30.

임재춘 시인 / 시작의 습관

 

 

해가 산기슭 가까이 다가가

마당은 모닥불을 지피고

뜰 한쪽엔 딸기 납작하게 엎드렸다

줄줄이 작은 열매들 몸을 숨겼다

나무 의자는 잔디밭의

어스름을 누르며 주저앉는다

텃밭 한 쪽에 드문드문 서 있는

비스듬한 외등

흐릿하게 뜰에 비친다

쥐들이 자주 닭을 넘보는

닭장 철조망의 구멍을 막는 일

손보던 일꾼들이 손을 씻고 떠난 후

어둠은 알을 품듯

호젓하게 뜰을 감싸 안는다

울타리 너머에 저녁별 하나 비치다 사라진다

시도 내 마음속에

잠깐 비친다, 길게 품으로 했지만

밤 깊어가고

머릿속 줄줄이 딸려 나오던 말들이

희미한 별들과 함께 잠속으로 빠져든다

닭들도 조용히 별 꿈을 꾼다

 

- 시와 사상 2012 가을호 -

 

 


 

 

임재춘 시인 / 잡념

 

 

간밤에 일찍부터 꿈을 꾸었다

불면과 잡꿈과의 사이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을 썼다

꿈꾼 이야기도 많이 집어넣었다고

죄를 짓고 멀리 도망갈까?

총 앞에 서보기도 했다고

그의 깊은 잠의 안쪽에

천부적 문장이 도사리고 있다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게 쓰고 싶었다고

 

시인도 소설가도 잡계급에 속한다는 번역가의 말이

맘에 콕 들어박혔다

자다가 깨어 시랍시고 시답시답 쓰는 밤

창문은 너무 빨리 밝아왔다

내 신분에 맞는

잡다한 일이

하루 종일 가득하다

씻은 손을 또 씻었다

손 닦고 또 쓰고

씻어도 모자란 죗값을 다 갚을 수 없다

잡념이 나를 품었다

 

 


 

 

임재춘 시인 / 끝물

 

 

더덕 꽃이

울타리에 종소리로 매달려 있다

백일홍은 씨방을 키우고

기다란 대궁에 늦옥수수 수염이 말라간다

나팔꽃 줄기 매달린 전봇대 밑에

소리로 여물어 가는 끝물,

해 오르기 전

축축한 참깻단을 베 온 아낙

톨톨한 가을볕을 만나야

뽀얗게 고스란히 빠질 것이다

입 다문 씨로 머문다는 것은

한생의 제 소리를 마감하는 것,

지상에 매달려 있는 울음이다

처마 위에 켜 있는

한가위 달은

가장 큰 지구의 가로등,

꺼졌다 켜지는 데 일 년이 걸린다

그림자가 내 몸을 끌고

달 속으로 환하게 들어간다

 

-임재춘 시집 『오래된 소금밭』,

 

 


 

임재춘 시인

1954년 충남 신도안 출생. 200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오래된 소금밭』 『치자꽃잎 같은 시간들』. 한국시인협회 회원. 성천아카데미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