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진용 시인 / 나무 시인
나무는 시인보다 더 시적이라고 상투적인 언사가 아니다
초록으로 세상을 점령한 위세에 늘려서도 철 늦은 빈 가지 쓸쓸한 뒷모습 때문도 아니다
밑둥치 남기고 트럭에 실려서 간 뒤, 비로소 그가 남긴 둥근 시구를 보았다
어느 시인이 온몸으로 제 나이를 그리겠느냐 나도 나이테를 두를 줄 아는 나이가 되었는가
담벽에 기댄 채 묵묵히 깊어가는 그의 그림자
채머리 흔들며 아니다 아니다 이마에 스친 바람도 머리 풀며 취하도록 빗물에 흠뻑 젖었던 날도 돌아보면 한 시절 삭정이처럼 삭이게 되었는가
겨울 초입, 가로등 불빛 아래 서 있는 그를 본다
마지막 남은 잎새 몇 장 발밑에 내려놓고 한 해 단 한 줄만을 남길 줄 아는 그는 온 몸으로 테를 두른 계관시인이다
우진용 시인 / 허공에 대하여
허공의 어딘가에 허점이 있다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불가지론의 입장이다 그들을 운명론자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세상사 모든 일이 대체로 허공 어디선가부터 시작된다 목소리와 눈빛들이 오가는 것도 허공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만나고 사랑하고 싸우다가 울기도 웃기도 하는 곳도 허공이다 형상 있는 것들은 허공을 밀어내고 경계를 긋지만 시간의 물결이 오고 가는 자리는 허공의 몫이었다 허공은 스스로를 허물어 경계로 삼는다 허공 어딘가에 허점이 숨어 있다 허점은 예고도 예보도 없다 주먹이 오가고 손바닥이 귀뺨을 찾아가는 길도 허점이 생긴 탓이다 속도와 속도가 길에서 부딪치는 것도 허점이 허방처럼 고여 있던 곳이다 어찌 알겠는가 허점이 때로 통점으로 바뀌는 것을 충무병원 308호실의 허공에는 통점들이 흘러 다녔다 그 통점들의 길이라도 있는 것인지 용케 길목마다 어김없이 사람들을 눕힌다 통점들의 여섯 길목마다 그에 맞춘 여섯 병상이 있다 등에 고인 통점은 밤마다 병상 아래로 흘러 내렸다 통점이 살을 만나면 살을 깎는다 깎아 내는 살마다 통점은 날을 세운다 통점은 불면을 앉힌다 어둠조차 투명해질 때면 통점의 끝물 소리가 들렸다 창 너머 아파트 불빛이 멀게 느껴지는 날푸른 밤이 자꾸 깊어 갔다 병동의 허공에 허점들이 몰려 있다 밤마다 통점으로 반짝이며 별자리로 흘러든다. 밤새 살을 깎던 통점이 비로소 잠이 드는 병동의 아침은 늘 눈에 시렸다
-계간 『시와 시학』 201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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