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구 시인 / 목발
늦은밤 분당선 지하철 푸른색 바탕에 흰색별 무더기를 모자처럼 눌러쓴 별 두 개가 침묵으로 깊다
우주 밖 어딘가 별에서 목숨으로 버티던 남자가 다리 하나를 잃고 지구별로 쫓겨갔다는 소문이 생각의 빠르기로 전해왔다
박현구 시인 / 바람비
손자를 앞세우고 밤마실을 나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달안개가 피어오르는 밤길이 어둡습니다 청춘으로 깔깔대던 벚꽃 잎은 덮여 오던 바람비에 쓸리고 켜켜이 쌓여서 발바닥에서는 키가 솟습니다 벙글던 삶은 색이 바래서 어김없이 스러지는데 슬플 것인가 꽃잎의 땅보탬은 대지를 키우고 보이지 않는 흔적을 허공에 남겼습니다
박현구 시인 / 무성영화
얼마나 오래 앓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링거액의 방울지는 갈증으로 부러진 휘추리처럼 길게 여윈 딸이
간병에 지쳐서 굽은 어머니를 휠체어에 모셨습니다
야윈 키가 얹혀서 가는 것 같습니다
실려 가는 건지 혹 끌려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버랩 되는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둘러 선 눈빛들이 글썽이며 함께 걷습니다
박현구 시인 / 낌새2
여름 땀이 뿜는 짭짤한 바람에 홀려 알짱대는 모기 두 마리
팔을 휘저어도 그때뿐 집요하다
내 몸이 부풀자 허공이 비었다
박현구 시인 / DNA -개성댁·3
저렇게 잽싼 몸놀림을 딱 한 번 본 기억이 있어
누렇게 낡은 안경테 속의 가는 눈은 실금처럼 수평으로 누워서 보이지 않는 먼지도 닦을 수 있어
백 년쯤은 젊어져서 지금도 회오리같이 바람을 몰고 다니지
길림성에서 살러 온 고단한 옛적의 조선 여인은 우리말이 서툴러서 몸이 먼저 말을 해
당신의 시詩를 들려주려고 해도 젊은 바람은 너무 빨라
폐업을 한다는 클럽의 마지막 날에도 바람은 여전해서 쉴 틈이 없어
개성댁의 DNA는 변하지 않아
박현구 시인 / 치매 연습
지하철의 경로석에서 단정하게 구겨진 회색빛 진동이 사람들의 몸통을 비집고 건너오다 바람도 없이 은녹색의 왜사시나무 잎은 낡은 통장을 열고 멍한 눈빛을 쏘다 마지막 페이지의 전 재산에 끝없는 파상波狀의 톱니로 구멍을 뚫다 속주머니에 들어가다 만 두 손이 먼저 간 아내의 마른 가슴 같아 그립게 껴안다 바라보는 눈빛은 블랙홀처럼 빨려들다 반 너머 삐어져 나온 주머니 안의 통장이 금세 흘러내릴 것 같아 마주 앉은 내가 슬픈 눈으로 몸짓하다 어물어물 알아채다 우물쭈물 지퍼를 채우다 떨리는 소리가 호수면의 바람 길처럼 파문을 일으키다 휘청거리는 발걸음이 거먹구름을 밟다 고향 사투리는 입에 그냥 있는데 귀밑머리에는 눈이 내리고 어둠의 그림자는 등을 밀며 오다 후회는 언제나 한발 늦게 오는 것 처음 맞는 일은 누구나 새롭게 시작하는 법
시집 <손이 많이 가는 남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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