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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해림 시인 / 역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

강해림 시인 / 역류

 

 

약국으로 갈까

병원으로 갈까 망설이다가

약국으로 간다

 

혼자서 진단하고

혼자서 처방내리는

 

신물이 올라와

속이 쓰린 것도 딸꾹질이 나는 것도 아닌데

 

명치가 돌처럼 딱딱해지고 쥐어짜듯 통증이 다녀가는 밤의 알리바이가 있긴 했어도

 

그날의 증인이라고

그날 본 게 다가 아니니까

증상은 증상일 뿐

 

텔레비전 화면을 타고 병원 신생아실에서 아이가 바꿔치기 됐다는 저녁 뉴스를 들으며 운명을 점치던 별자리도

 

모래시계의 모래도 거꾸로 흘러 사막으로 가고

 

배반과 모순,

역설만이 시간을 거슬러 낯선 땅, 낯선 곳으로 가지

 

계절도 역주행 하는지 어지럼증 같은 꽃망울 피워 대고

 

모천 회귀하는 것들은 바다에서 강을 거슬러 헤엄쳐가지 태양과 달을 나침반 삼아, 천신만고 끝에

 

내 안의 수천수만 연어 떼가 돌아오고 있어 피가 거꾸로 솟고, 힘찬 지느러미, 눈부신 산란 캄캄한

 

산도産道가 열리고 있어

 

계간 『신생』 2021년 가을호 발표

 

 


 

 

강해림 시인 / 츄파춥스

 

 

사탕수수 밭이 불탈 때, 붉은 혀의 무리가 미친 듯 질주하면서 토해내는

검은 연기야

 

슬픈 영가야

너는

 

너를 핥고 빠는 동안

너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지만

 

달콤했던 기억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혀의 아뢰야식엔 몽환처럼

남아

 

운 좋으면

원 플러스 원

 

세븐 일레븐

계산대 옆 손 뻗으면

닿을 곳에서 노오란 데이지꽃 향기도 없는 것이

 

아찔한, 천사의 유혹 같은 것이

 

뜨거운 태양 아래

사탕수수는 땀과 눈물과 쓰라린 채찍질이 지나간 후에야

익어가고

 

달콤한 고백은

왠지 씁쓸하고

 

네펜더스라는 식충식물은 주머니처럼 생긴 포충낭을 가졌다

단내를 막고

미끈거리는 입구를 기웃거렸다간 지옥행이다

 

아무리 소리쳐 부르고 바둥거려도

소용이 없다

 

츄파춥스

츄파춥스

 

-K-poem 2022년 발표

 

 


 

강해림 시인

1954년 대구 출생. 한양대 국문과 수료. 1991년 계간 『민족과문학』, 1997년 월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구름 사원』(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 선정), 『환한 폐가』, 『그냥 한번 불러보는』 등이 있다. 2012년 <대구문학상>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