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은호 시인 / 상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

김은호 시인 / 상추

 

 

그 여자, 상추포기 같다

아담한 적상추가 어울리겠다

 

너무 퍼지지도 퍼렇지도 않고 적당히 허연 구석,

주름지고 불그레한 사연도 있다

 

겹겹의 상추로 싼 고기 한 점

나팔꽃 같은 입에 밀어 넣는다

 

좌우로 신나는 드리블

볼때기가 축구공만 하게 튀어나온다

상추로 만든 공이 골망을 뒤흔든다

입 안 가득 햇살과 시냇물의 환호성

 

상추 꽃대에서 늦봄이 살랑거린다

 

나이보다 십 년은 젊어 보이는,

연약한 것 같으면서도 상큼한

상추의 미덕을 지닌 여자

 

영혼의 텃밭에도 싱싱한 상추를 가꿔 먹을 게 분명한 여자

 

상추에 지고 작전타임도 다 쓴 내가

연거푸 두 골 먹은 골키퍼처럼

바라보는 여자

 

상추쌈 싸서, 느닷없이 내 입에 넣어주는,

또 한 골 넣는 여자

 

 


 

 

김은호 시인 / 신발장수의 노래

 

 

어쩌다 신발에 빠졌다 학교에서 배운 외국어 몇 마디가 신발 끈도 매지 못한 나를 수출 전선으로 끌고 갔다

 

왕자표* 고무신이 자꾸 늘어나 세상에서 가장 큰 신발공장이 된 건 어느 한 겨울밤의 꿈

 

공원들은 쉴 새 없이 청춘을 재단하고 박음질했다 검은 폐수 너머로 밀고 가는 꿈은 메케한 공장 굴뚝 연기 속에서 자주 콜록거렸다 땀 냄새 밴 컨베이어 벨트 위를 달리는 프로스펙스, 나이키, 아디다스..... 운동화들이 그 계절, 우리들의 밥그릇이었다

 

‘동물의 왕국까지 가서 신발을 팔아라!’ 나는 신발 세일즈맨, 가끔 신발 속에 영혼도 구겨 넣어 팔았다 남미의 항구 발파라이소(Valparaiso) 유대 상인에게 신발 주문을 받으면 태평양 건너 부산항에서 들려오던 수출 컨테이너 화물선의 긴 뱃고동 소리.... ‘메이드 인 코리아’ 날개를 단 신발들의 하늘은 푸르렀다

 

오래도록 내 발을 물고 놓아주지 않던 신발, 화공약품 냄새나는 밥그릇 들고 노래하는 동안 청춘은 모래알처럼 구멍 난 신발을 빠져나갔다

 

야근으로 치닫던 긴 노동은 지금 어느 구석에서 고단한 생의 냄새를 뿜고 있는가 저 많은 빌딩과 자동차들은 땀과 눈물로 만든 신발을 신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전철 승강장에 쪼그리고 앉아 자주 풀어지는 내 신발 끈을 다시 조여 매고 있다

 

*왕자표: 1950년대부터 국제상사가 생산하던 고무신, 운동화 상표

 

 


 

김은호 시인

경남 진해(창원시)에서 출생. 한국외국어대 스페인어과 졸업. 2015년 계간 《시와소금》으로 등단. 시집으로 『슈나우저를 읽다』가 있음. 종합상사 파나마 주재원. 홍콩에서 무역업. 현재 한국 가톨릭문인회 회원으로 활동 중.